준호는 커피를 마시기 위해 커피포트에 생수를 부었다.
연희는 알몸인 채로 시트를 몸에 둘둘 말고 침대머리맡에 기대어
준호의 움직임을 바라보았다.
물은 끓기 시작했고 스팀관에서 약하게 소리가 났다.
준호는 인스턴트 커피를 컵에 담고 펄펄 끓는 물을 부으면서 건조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선생님과 헤어진 이후로 한 번도 행복하다 생각했던 적이 없어요.
그리곤 커피잔을 손에 든 채로 시선을 그쪽으로 하면서
그 속에서 자기가 하는 말을 다 들여다 보고 있는 듯이 덧붙여 말했다.
-기분좋은 일을 만들어내고 싶었지만 내 운수에는 없나봐요.
연희에게는 그 말이
-지금도 행복하지 않아요
라는 것으로 들렸다.
준호가 연희에게 커피를 건네고 돌아섰지만
화장대의 거울에 비친 연희를 계속 응시하며 또 말했다.
-연희씨가 만일, 이제 연락하지 말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렇게 할거예요.
준호가 바라보는 거울과 침대 옆 거울의 마주보고 있는 구조로
거울은 서로 반사시키며 여러 각도로 연희의 얼굴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것은 저마다 다른 표정인 것으로 준호에게 비쳐졌다.
준호는 연희를 살피듯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속에서 무엇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연희는 수백 개의 생각으로 신경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준호에게는 오늘의 일이
내일이면 잊혀질 하룻밤의 흔한 에피소드가 이미 돼 버린 지도 몰랐다.
큰 환멸이 연희를 춥게 만들었다.
연희는 시트를 더 단단하게 몸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러나 곧 다시 추스르며 의지적으로 생각했다.
자기생각의 허영심이 값싼 효과를 허용함으로 쉽게 타락해버렸다고 하더라도
그런 명백한 결과는 나를 제자리로 빨리 돌려놓을 수 있다고..
그러면서 선악의 얽힌 혼돈에서 풀려날 수 있게 된 것을 자축하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고 조금은 슬퍼지는 기분에 모순을 느꼈다.
그러나 인생에 관해서
그처럼 이해가 깊고 조심스럽고 고요한 방법으로 사는 것을 알고 있는 연희가
이런 과오를 범한다는 것이 스스로에게 모순처럼 생각될 수도 있으나..
연희는 자기가 운명을 앞질러 손에 잡았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준호는 연희와 같이 전 생애를 보내고 싶다는 소망 이외에는
아무 소망도 자기에게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연락하지 말라면 그렇게 하겠다는 말을 해버린 것으로
언젠가 후회할는지도 모르지만,
연희가 자기에게 묶여있는 존재가 아님을 말해주고 싶었던 것이었다.
연희는 마시지 않고 식혀버린 커피를 내려놓고
기계적인 인내심으로 샤워를 하고 옷을 챙겨 입고 머리를 말렸다.
이 모든 행동들은 너무 더디게 진행되는 것 같았다.
연희는 이 자리를 빨리 모면하고 싶었다.
그러나 평소에 자기가 경멸해 왔던,
밤중에 술에 취해 남자와 모텔에 들어갔다가
아침에 부스스한 얼굴로 다시 모텔에서 나오는 여자의 모습처럼
조금 있으면 똑같이 해야한다는 사실에 끔찍해져서 밖으로 나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연희는 이런 심정을 준호에게 털어놓았다.
-나는 이런 감정을 가져 본 일이 없어요.
준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연희의 참을 수 없이 쓸쓸하고 다시 적의에 찬 모습이 준호를 우울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러나 준호는 일각도 지체 없이 떠날 때가 온 것처럼
안절부절 못하고 서성이는 연희의 손을 끌어내어 밖으로 나갔다.
재촉하는 걸음으로 모텔에서 멀어지자
연희는 자기의 어깨를 보호하듯 꽉 끌어안고 있던 준호를 가볍게 밀쳐내며 말했다.
-내가 좋지 못한 일에 당신을 끌어들인 것 같아요. 하지만 미안해하지는 않겠어요.
왜냐하면 며칠 지나면 별스럽지 않은 기억이 되고 점차 잊혀질테니까요.
그것은 자기가 퇴짜맞은 지루한 잡지책 같은 여자가 되었음을 암시하는 어투였다.
그런데 준호는 근심이 섞인 웃음을 띄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부탁이 있어요
-.....?
-내일 나랑 영화 같이 봐줘요.
그 말 속에 거절에 대한 염려와 천진함이 함께 있음을
이제 금새 알아챌 수 있게 되어버린 연희는
준호가 새로 만들어낸 약의 효과에 다시 취하는 느낌으로 정신이 아득해져 왔다.
마치 마약처럼, 심연에서 올라오는 어떤 향기를 맡은 것처럼..
(이 뭉클함은 왜일까.
도대체 이 사람의 인간적인 영혼을 인식할 때까지는 무슨 일이 더 일어나야 하는 것일까?)
연희와 헤어지고 준호는 전철 안에서 시간을 되감아 재생하고 있었다.
이틀 동안 경험한 연희의 생기와 냉담의 격렬한 정열과 무시무시한 극복력과 이별 까지.
그러나 무엇보다 연희를 품에 안았던 새벽 동안의 그 장면 전부를.
준호는 너무나 아름다운, 완전한 날들을 겪었기 때문에 숨을 쉴 수도 없을 정도였다.
이러한 날들이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은
자기의 모든 경험과 생의 원칙에 위반되는 것이라 생각하며 전율을 느꼈다.
(나는 감히 미래는 생각할 수가 없다. 그러나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이것만은 확실하다.
이 날들이 존재했다는 것만은. 어떤 것들도 이 날들을 내 기억에서 지우지는 못할 것이다.
착한 아내를 두고도 연희를 바라보는 것이 욕심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러나 누가 이 일로 연희나 나를 비난한다면 나는 화를 낼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거짓된 마음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연희라는 존재가 내 시야에 들어온 이상 당연히 하게 될 일을 한 것이니까.
이 일이 세상에 알려진다면 아내는 아프고 괴로움을 당할 것이다.
그렇다고 아내에게 진상을 기만시키고 껍데기를 끌어안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준호는 이런 생각들로 마음이 무거웠지만 그것은 애정이 아닌 동정이었다.
준호는 학교 기숙사로 돌아가자 마자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체력의 한계를 느끼며
침대에 쓰러져 무의식 세계에 빠져들었다.
연희는 오후 수업 내내 준호와의 일을 머리 속에서 쫓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의 논제는 엘빈 토플러의 문화충격이었다.
-지난 시간에 현우가 논제를 선택했으니 오늘은 현우부터 발표해보겠니?
연희가 자료의 첫 페이지를 넘기며 말했다.
현우가 발표를 시작했지만 연희는 집중하지 못하고 딴 생각에 빠져 있었다.
연희는 준호를 공감하고 있으면서도 그걸 긍정하고 싶지 않았다.
연희에게 정신은 배고픔이나 비나 더위와 마찬가지로 현실적인 것이었다.
연희는 자기의 어리석은 실수와 어떤 여자에게는 모욕이었을을 행동에 대해 자학했다.
(인생에서는 어떤 계산도 들어맞는 법이 없고
아무런 결말을 갖고 있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오만하게 판단했다.
모든 것은 혼란스럽고 아무 논리도 없고 즉흥적으로 생성되고 있다.
그런데 나는 거기서 작은 조각을 끌어내서
생의 복잡성에 비하면 우스울 정도인
조그마한 알뜰스러운 설계도에 따라서 건축해버린 것이다.
모두가 내 이기심이 최면을 거는대로 꾸며진 사진에 불과한데도.
그런데 나는 서준호가 좋다. 지금도 그 사람이 보고 싶다.
물론 세상에는 준호 보다 멋진 남자들이 많았다.
그렇지만 그런 남자라고 해서 속이 차 있는 경우는 드물었다.
텅 비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은 대화를 통해 여지없이 드러났다.
훌륭한 외모나 화려한 배경, 유연한 처세로 견준다면
준호는 외관상 보잘 것 없는 남자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준호는 서툴지만 사람을, 적어도 나를 매료시키는 점을 가지고 있었다.
준호도 나처럼 상처 입기 쉬운 그림자를 가지고 있는 남자인 것 같았다)
현우의 발표가 끝나고 아이들이 선생님의 이야기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연희는 펼쳐 놓은 첫 페이지 어디쯤에 의미 없는 시선을 두고서
만연필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눈치 빠른 현우가 옆에 앉은 친구에게 곁눈질을 하자
이번엔 동주가 발표하기 시작한다.
-파키스탄의 일부부족은 딸이 불륜을 저질렀다는 확신이 서면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 오빠들이 여동생을 살해한다.
이를 명예살인이라고 하는데 해당국 법원에서는 이에 살인죄를 적용시키지 않는다.
아프리카의 일부부족은 여자아이가 어느 정도 성숙해지면 여성할례의식을 행한다.
클리토리스의 일부분을....
-동주야, 거기까지만! 수고했어.
얘들아, 이번 과제는 선생님이 따로 검토한 후에 다음 시간에 토론하도록 하자.
결국 연희는 20분이나 일찍 수업을 마무리 하고 미안한 마음으로 아이들과 헤어졌다.
집에 도착하자 긴장이 풀어지고 습격하듯 피곤이 몰려왔다.
옷을 벗을 기운조차 없이 가방을 내던지고 기절하듯 소파에 쓰러져 앉는데
친구 민숙이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응.
-연희야, 나 3일 후에 너한테 간다!
-응?
-계집애야, 난 이제 자유라구. 드디어 사표 접수했어!!
연희는 알몸인 채로 시트를 몸에 둘둘 말고 침대머리맡에 기대어
준호의 움직임을 바라보았다.
물은 끓기 시작했고 스팀관에서 약하게 소리가 났다.
준호는 인스턴트 커피를 컵에 담고 펄펄 끓는 물을 부으면서 건조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선생님과 헤어진 이후로 한 번도 행복하다 생각했던 적이 없어요.
그리곤 커피잔을 손에 든 채로 시선을 그쪽으로 하면서
그 속에서 자기가 하는 말을 다 들여다 보고 있는 듯이 덧붙여 말했다.
-기분좋은 일을 만들어내고 싶었지만 내 운수에는 없나봐요.
연희에게는 그 말이
-지금도 행복하지 않아요
라는 것으로 들렸다.
준호가 연희에게 커피를 건네고 돌아섰지만
화장대의 거울에 비친 연희를 계속 응시하며 또 말했다.
-연희씨가 만일, 이제 연락하지 말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렇게 할거예요.
준호가 바라보는 거울과 침대 옆 거울의 마주보고 있는 구조로
거울은 서로 반사시키며 여러 각도로 연희의 얼굴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것은 저마다 다른 표정인 것으로 준호에게 비쳐졌다.
준호는 연희를 살피듯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속에서 무엇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연희는 수백 개의 생각으로 신경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준호에게는 오늘의 일이
내일이면 잊혀질 하룻밤의 흔한 에피소드가 이미 돼 버린 지도 몰랐다.
큰 환멸이 연희를 춥게 만들었다.
연희는 시트를 더 단단하게 몸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러나 곧 다시 추스르며 의지적으로 생각했다.
자기생각의 허영심이 값싼 효과를 허용함으로 쉽게 타락해버렸다고 하더라도
그런 명백한 결과는 나를 제자리로 빨리 돌려놓을 수 있다고..
그러면서 선악의 얽힌 혼돈에서 풀려날 수 있게 된 것을 자축하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고 조금은 슬퍼지는 기분에 모순을 느꼈다.
그러나 인생에 관해서
그처럼 이해가 깊고 조심스럽고 고요한 방법으로 사는 것을 알고 있는 연희가
이런 과오를 범한다는 것이 스스로에게 모순처럼 생각될 수도 있으나..
연희는 자기가 운명을 앞질러 손에 잡았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준호는 연희와 같이 전 생애를 보내고 싶다는 소망 이외에는
아무 소망도 자기에게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연락하지 말라면 그렇게 하겠다는 말을 해버린 것으로
언젠가 후회할는지도 모르지만,
연희가 자기에게 묶여있는 존재가 아님을 말해주고 싶었던 것이었다.
연희는 마시지 않고 식혀버린 커피를 내려놓고
기계적인 인내심으로 샤워를 하고 옷을 챙겨 입고 머리를 말렸다.
이 모든 행동들은 너무 더디게 진행되는 것 같았다.
연희는 이 자리를 빨리 모면하고 싶었다.
그러나 평소에 자기가 경멸해 왔던,
밤중에 술에 취해 남자와 모텔에 들어갔다가
아침에 부스스한 얼굴로 다시 모텔에서 나오는 여자의 모습처럼
조금 있으면 똑같이 해야한다는 사실에 끔찍해져서 밖으로 나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연희는 이런 심정을 준호에게 털어놓았다.
-나는 이런 감정을 가져 본 일이 없어요.
준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연희의 참을 수 없이 쓸쓸하고 다시 적의에 찬 모습이 준호를 우울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러나 준호는 일각도 지체 없이 떠날 때가 온 것처럼
안절부절 못하고 서성이는 연희의 손을 끌어내어 밖으로 나갔다.
재촉하는 걸음으로 모텔에서 멀어지자
연희는 자기의 어깨를 보호하듯 꽉 끌어안고 있던 준호를 가볍게 밀쳐내며 말했다.
-내가 좋지 못한 일에 당신을 끌어들인 것 같아요. 하지만 미안해하지는 않겠어요.
왜냐하면 며칠 지나면 별스럽지 않은 기억이 되고 점차 잊혀질테니까요.
그것은 자기가 퇴짜맞은 지루한 잡지책 같은 여자가 되었음을 암시하는 어투였다.
그런데 준호는 근심이 섞인 웃음을 띄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부탁이 있어요
-.....?
-내일 나랑 영화 같이 봐줘요.
그 말 속에 거절에 대한 염려와 천진함이 함께 있음을
이제 금새 알아챌 수 있게 되어버린 연희는
준호가 새로 만들어낸 약의 효과에 다시 취하는 느낌으로 정신이 아득해져 왔다.
마치 마약처럼, 심연에서 올라오는 어떤 향기를 맡은 것처럼..
(이 뭉클함은 왜일까.
도대체 이 사람의 인간적인 영혼을 인식할 때까지는 무슨 일이 더 일어나야 하는 것일까?)
연희와 헤어지고 준호는 전철 안에서 시간을 되감아 재생하고 있었다.
이틀 동안 경험한 연희의 생기와 냉담의 격렬한 정열과 무시무시한 극복력과 이별 까지.
그러나 무엇보다 연희를 품에 안았던 새벽 동안의 그 장면 전부를.
준호는 너무나 아름다운, 완전한 날들을 겪었기 때문에 숨을 쉴 수도 없을 정도였다.
이러한 날들이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은
자기의 모든 경험과 생의 원칙에 위반되는 것이라 생각하며 전율을 느꼈다.
(나는 감히 미래는 생각할 수가 없다. 그러나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이것만은 확실하다.
이 날들이 존재했다는 것만은. 어떤 것들도 이 날들을 내 기억에서 지우지는 못할 것이다.
착한 아내를 두고도 연희를 바라보는 것이 욕심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러나 누가 이 일로 연희나 나를 비난한다면 나는 화를 낼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거짓된 마음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연희라는 존재가 내 시야에 들어온 이상 당연히 하게 될 일을 한 것이니까.
이 일이 세상에 알려진다면 아내는 아프고 괴로움을 당할 것이다.
그렇다고 아내에게 진상을 기만시키고 껍데기를 끌어안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준호는 이런 생각들로 마음이 무거웠지만 그것은 애정이 아닌 동정이었다.
준호는 학교 기숙사로 돌아가자 마자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체력의 한계를 느끼며
침대에 쓰러져 무의식 세계에 빠져들었다.
연희는 오후 수업 내내 준호와의 일을 머리 속에서 쫓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의 논제는 엘빈 토플러의 문화충격이었다.
-지난 시간에 현우가 논제를 선택했으니 오늘은 현우부터 발표해보겠니?
연희가 자료의 첫 페이지를 넘기며 말했다.
현우가 발표를 시작했지만 연희는 집중하지 못하고 딴 생각에 빠져 있었다.
연희는 준호를 공감하고 있으면서도 그걸 긍정하고 싶지 않았다.
연희에게 정신은 배고픔이나 비나 더위와 마찬가지로 현실적인 것이었다.
연희는 자기의 어리석은 실수와 어떤 여자에게는 모욕이었을을 행동에 대해 자학했다.
(인생에서는 어떤 계산도 들어맞는 법이 없고
아무런 결말을 갖고 있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오만하게 판단했다.
모든 것은 혼란스럽고 아무 논리도 없고 즉흥적으로 생성되고 있다.
그런데 나는 거기서 작은 조각을 끌어내서
생의 복잡성에 비하면 우스울 정도인
조그마한 알뜰스러운 설계도에 따라서 건축해버린 것이다.
모두가 내 이기심이 최면을 거는대로 꾸며진 사진에 불과한데도.
그런데 나는 서준호가 좋다. 지금도 그 사람이 보고 싶다.
물론 세상에는 준호 보다 멋진 남자들이 많았다.
그렇지만 그런 남자라고 해서 속이 차 있는 경우는 드물었다.
텅 비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은 대화를 통해 여지없이 드러났다.
훌륭한 외모나 화려한 배경, 유연한 처세로 견준다면
준호는 외관상 보잘 것 없는 남자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준호는 서툴지만 사람을, 적어도 나를 매료시키는 점을 가지고 있었다.
준호도 나처럼 상처 입기 쉬운 그림자를 가지고 있는 남자인 것 같았다)
현우의 발표가 끝나고 아이들이 선생님의 이야기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연희는 펼쳐 놓은 첫 페이지 어디쯤에 의미 없는 시선을 두고서
만연필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눈치 빠른 현우가 옆에 앉은 친구에게 곁눈질을 하자
이번엔 동주가 발표하기 시작한다.
-파키스탄의 일부부족은 딸이 불륜을 저질렀다는 확신이 서면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 오빠들이 여동생을 살해한다.
이를 명예살인이라고 하는데 해당국 법원에서는 이에 살인죄를 적용시키지 않는다.
아프리카의 일부부족은 여자아이가 어느 정도 성숙해지면 여성할례의식을 행한다.
클리토리스의 일부분을....
-동주야, 거기까지만! 수고했어.
얘들아, 이번 과제는 선생님이 따로 검토한 후에 다음 시간에 토론하도록 하자.
결국 연희는 20분이나 일찍 수업을 마무리 하고 미안한 마음으로 아이들과 헤어졌다.
집에 도착하자 긴장이 풀어지고 습격하듯 피곤이 몰려왔다.
옷을 벗을 기운조차 없이 가방을 내던지고 기절하듯 소파에 쓰러져 앉는데
친구 민숙이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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