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저녁 세 사람은 다시 만났다.
연희는 내키지 않았지만
준호가 먼저 원했고 민숙도 별달리 반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하기로 했다.
민숙은 여전히 준호에게 친절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알 수 있을 만큼 서투르게 가장된 무관심이었다.
준호는 꼭 같은 벌을
잠자코 무관심하게 일종의 완강한 기쁨의 표정을 띠고 받아들였다.
이것은 민숙도 느낄 수 있는 것이었고 민숙의 마음을 조금은 움직이게 만들었다.
연희는 민숙을 위해 꽤 유명한 해물찜 집에 자리를 마련했다.
출출한 상태에서 20분을 기다려 푸짐한 해물찜이 나오자
민숙이 감탄스럽게 말했다.
-음... 냄새 부터가 끝내준다. 이게 얼마만이니?
3년 전 상애 결혼식 이후 처음이지?
-내일은 참치회 먹으러 가자. 너 참치회도 좋아하잖아.
연희가 엷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준호가 새우껍질을 벗겨내고 게살을 발라서 연희 앞에 놓아주었다.
한두 번 그렇게 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연희가 사양하는데도 계속해서 그렇게 했다.
준호의 손길이 움직일 때 마다 손등에 붙여놓은 반창고도 따라 움직였다.
민숙이 준호의 세심함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이죽거렸다.
-사랑의 훈장 멋있는 걸요.
연희가 얄밉다는 듯 흘겨보자 민숙이 준호와 연희를 번갈아 바라보며 겸연쩍게 덧붙였다.
-무슨 남자가 가만히 있으란다고 정말로 그렇게 해요?
어찌되었든 갈라놓으려다 더 붙여놓은 꼴이 되어버렸잖니?
사랑은 장애물을 만났을 때 더 활활 타오르는 법이라는 이론을 실제로 경험하게 될 줄이야.
그건 사실이었다.
그 일이 순간의 행복을 흐리게는 했으나
또 그런 만큼 준호와 연희 사이에 오가는 감정의 달콤한 맛을 더 강하게 만들어준 것은 분명했다.
계산하고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지만
준호는 연희가 고통을 공감하고 자기를 위해 불같이 화를 냈다는 사실이 놀랍고 기쁘면서
민숙에 대해 고마운 마음마저 드는 것이었다.
세 사람의 시간은 비교적 평화롭게 흘러갔다.
식사를 마치고 식당에서 나오며 연희가 후식으로 커피는 마시지 않겠다고 하자
준호가 좋은 생각이 났나는 듯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아이스크림은 어때요?
연희와 민숙이 흔쾌히 동의하자 준호는 신이 난 모습으로 어디론가 뛰어갔다.
그곳은 구멍가게였는데
잠시 후 준호가 돌아왔을 때 손에는 설레임이라는 아이스크림 세 개가 들려 있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이에요.
꽁꽁 얼어있는 것을 손의 체온으로 서서히 녹혀 먹는 재미가 일품이죠.
무엇보다 이름이 마음에 들어서요..
준호의 소년 같은 취향에 연희와 민숙이 웃었다.
식당이 연희의 집에서 멀지 않았기 때문에
세 사람은 설레임을 입에 물고 나란히 8월의 밤거리를 걸었다.
준호가 가만히 연희의 손을 잡았다.
그리곤 설레임을 입에 물고 볼이 옴폭 들어갔다 볼록해졌다를 반복하는 연희의 옆모습을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듯 바라보았다.
연희는 애정을 표현할 때, 차라리 세상 사람들에게 들켜지길 원하는 것 같이
어느 곳에서나 스스럼이 없고 당당한 준호의 태도를 보며 생각했다.
(이 사람의 자신감의 근거는 도데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 사람의 막연한 말과 열렬한 소원에 있을 뿐인 것이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민숙은 연희에게 닥쳐 올 앞날들을 생각해 보면 아직도 기가 막히고 걱정스러웠지만
그러면서도 두 사람의 모습이 자연스럽고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면서
준호에 대한 낙인이 응고되지 못하고 떨어져 나가게 될 것이란 예감에 불안해졌다.
멀리서 연희의 아파트가 모습을 드러내자 준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고
아쉬움이 가득 차오르는 것이 보였다.
준호는 연희를 만난 이후 연희와 끊겨져 있는 시간들이 제일 힘겨웠다.
그 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고 게다가 내일은 주말이었다.
-내일 집에 가시죠? 조심운전 하세요.
아파트 정문에 다다르자 잡은 손을 놓으며 연희가 의례적 인사말을 했다.
준호는 굳어진 얼굴과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 했다.
한 여름 밤의 꿈처럼 매혹은 사라지고 현실이 앞에 놓였다.
준호는 (나는 너와 헤어지기 싫다. 그래서 내일 집에 가지 않겠다.
너와 함께 계속 여기에 머무르고 싶다)고 털어놓지 않은 자신에게 속으로 화를 냈다.
그러나 연희는 알 수 있었다.
준호의 그런 마음을....
준호가 시야에서 멀어지는 것을 보며
연희는 바람에 섞여 불분명하게 들려오는 거리의 음악소리를 듣고 있었다.
-뭘 생각하니?
민숙이 한동안의 침묵을 깨며 묻자
연희가 비스듬한 시선을 재빨리 던지며 말했다.
-술 한 잔 할래?
민숙은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오늘은 독한 술이 필요할 것 같아.
밤공기는 열린 창문을 통해 집 안으로 기분 좋게 스며들고 있었다.
이따금씩 회오리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연희는 글라스에 얼음을 듬뿍 넣고 위스키를 반쯤 따른 후 민숙에게 건냈다.
실내등을 끄고 스텐드를 켜자 그윽한 조명을 받아 두 사람의 얼굴 윤곽은
밝음과 어둠으로 극명하게 대조되어 더 뚜렷하고 강한 인상을 풍겼다.
민숙이 이제는 다 털어놓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시선으로 연희를 쳐다보자
연희는 주저하면서 말했다.
-사람이 처음에는 몹시 혐오를 가지고 시작한 일에 마침내 익숙해져 버린다는 것 아니겠어.
연희는 여기까지 말하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겨우 덧붙여 말했다.
-너를 이해시킬 자신이 없어. 실은 나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겠거든.
-그렇다면, 내가 묻는 말에 대답은 할 수 있겠지?
-....
-그 사람과 잤니?
연희가 시선을 아래로 두고 머뭇거리다 힘겹게 대답했다.
-....응.
-맙소사! 벌써 그랬단 말이구나.
민숙은 단지 자기가 열심히 묻는 것에 대한 대답으로서
담담하게 연희가 말해주는 보고로 몹시 큰 충격에 빠졌다.
그것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연희가 남자 때문에
이토록 흔들리는 모습을 본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민숙은 위스키를 몇 모금 꿀꺽꿀꺽 들이키더니 다소 격양된 어조로 말했다.
-우리 아빠, 바람피우느라 엄마 속 썩이고 반평생을 집 밖으로 전전하다가
말년에 외톨이 되어서 작년에 목 매달아 자살한 거 너도 알지?
내가 네 편을 들어주길 바라니?
연희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다가 목이 메는 소리로 겨우 말했다.
-미안해..
-우리 집 이야기로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어.
단지 나는 네가 그 누구의 불행에도 일조하는 일이 없게 되길 바랄 뿐이야.
하지만 지금은 얘기를 더 듣고 싶어.
연희는 저주가 가슴 깊은 곳으로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사람들은 마치 극장에서처럼 모든 것이 질서정연하게 진행 될 거라고 생각해.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자기가 리얼리스트라고 생각하고 있어.
민숙아, 난 마치 조용히 길을 걷다 무방비 상태에서 트럭에 치인 사람 같아.
그 사람에게 가정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을 때는 모든 것이 간단하고 여지없어 보였어.
그런데 내가 그 사람 곁에 있을 때면 나는 부자유스러워 지고
그 사람의 무언가로부터 통제를 당하는 느낌이 들어.
그 사람은 나를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몰아가.
그 사람은 나를 수줍은 소녀로 만들어놓고
동시에 성숙한 여자만이 할 수 있는 결단을 나로부터 요구해.
-그 사람을 사랑하니? 사랑해서 잔거니?
-글쎄.. 잘 모르겠어. 그것 보다는..
연희는 무안한 얼굴과 자기를 불쾌하게 생각하는 기분이 되어 엄지손톱을 깨물며 말했다.
-나는 다만 나와 그 사람을 시험해 보고 싶었을 뿐이었어.
그 사람에게서 나 자신을 재어 보고 싶을 뿐이었어.
섹스는 다만 외관상의 결합일 뿐이야.
그런데도 남자들 대부분의 궁극의 목적이 섹스라는 것도 나는 알고 있어.
그래서 나는 그 카드를 사용한 것에 지나지 않아.
그 사람이 너무 쉽게 빨리 목적을 달성해버린다면
모든 게 명백하게 판가름날거라 생각했던 거야.
하지만 그건 최면에 불과했어. 어리석은 짓이 되고 말았어.
-어쩜 좋아! 너 그 사람에게 단단히 빠져버렸구나!
연희가 부정하는 표정으로 반박하려 하자 민숙이 재빠르게 가로채며 덧붙였다.
-그 사람의 무엇이 널 이렇게 끌리게 만든 거니?
연희가 글라스를 만지작거리며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그렇게도 많은 괴물들 사이에서 단 하나의 느낄 줄 아는 가슴의 소유자인 것 같아.
그 사람은 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게 만들어진 인간인 것 같아.
-어떤 이유를 빙자한다고 해도 유부남과의 관계가 정당화 될 수는 없는 거야.
민숙이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그래 맞아.
연희는 힘없이 우울하게 긍정했다.
연희는 냉담이나 애정에 넘친 인내라고 볼 수 있는 조용한 태도로
민숙의 적개심을 받아들였다.
연희는 내키지 않았지만
준호가 먼저 원했고 민숙도 별달리 반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하기로 했다.
민숙은 여전히 준호에게 친절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알 수 있을 만큼 서투르게 가장된 무관심이었다.
준호는 꼭 같은 벌을
잠자코 무관심하게 일종의 완강한 기쁨의 표정을 띠고 받아들였다.
이것은 민숙도 느낄 수 있는 것이었고 민숙의 마음을 조금은 움직이게 만들었다.
연희는 민숙을 위해 꽤 유명한 해물찜 집에 자리를 마련했다.
출출한 상태에서 20분을 기다려 푸짐한 해물찜이 나오자
민숙이 감탄스럽게 말했다.
-음... 냄새 부터가 끝내준다. 이게 얼마만이니?
3년 전 상애 결혼식 이후 처음이지?
-내일은 참치회 먹으러 가자. 너 참치회도 좋아하잖아.
연희가 엷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준호가 새우껍질을 벗겨내고 게살을 발라서 연희 앞에 놓아주었다.
한두 번 그렇게 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연희가 사양하는데도 계속해서 그렇게 했다.
준호의 손길이 움직일 때 마다 손등에 붙여놓은 반창고도 따라 움직였다.
민숙이 준호의 세심함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이죽거렸다.
-사랑의 훈장 멋있는 걸요.
연희가 얄밉다는 듯 흘겨보자 민숙이 준호와 연희를 번갈아 바라보며 겸연쩍게 덧붙였다.
-무슨 남자가 가만히 있으란다고 정말로 그렇게 해요?
어찌되었든 갈라놓으려다 더 붙여놓은 꼴이 되어버렸잖니?
사랑은 장애물을 만났을 때 더 활활 타오르는 법이라는 이론을 실제로 경험하게 될 줄이야.
그건 사실이었다.
그 일이 순간의 행복을 흐리게는 했으나
또 그런 만큼 준호와 연희 사이에 오가는 감정의 달콤한 맛을 더 강하게 만들어준 것은 분명했다.
계산하고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지만
준호는 연희가 고통을 공감하고 자기를 위해 불같이 화를 냈다는 사실이 놀랍고 기쁘면서
민숙에 대해 고마운 마음마저 드는 것이었다.
세 사람의 시간은 비교적 평화롭게 흘러갔다.
식사를 마치고 식당에서 나오며 연희가 후식으로 커피는 마시지 않겠다고 하자
준호가 좋은 생각이 났나는 듯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아이스크림은 어때요?
연희와 민숙이 흔쾌히 동의하자 준호는 신이 난 모습으로 어디론가 뛰어갔다.
그곳은 구멍가게였는데
잠시 후 준호가 돌아왔을 때 손에는 설레임이라는 아이스크림 세 개가 들려 있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이에요.
꽁꽁 얼어있는 것을 손의 체온으로 서서히 녹혀 먹는 재미가 일품이죠.
무엇보다 이름이 마음에 들어서요..
준호의 소년 같은 취향에 연희와 민숙이 웃었다.
식당이 연희의 집에서 멀지 않았기 때문에
세 사람은 설레임을 입에 물고 나란히 8월의 밤거리를 걸었다.
준호가 가만히 연희의 손을 잡았다.
그리곤 설레임을 입에 물고 볼이 옴폭 들어갔다 볼록해졌다를 반복하는 연희의 옆모습을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듯 바라보았다.
연희는 애정을 표현할 때, 차라리 세상 사람들에게 들켜지길 원하는 것 같이
어느 곳에서나 스스럼이 없고 당당한 준호의 태도를 보며 생각했다.
(이 사람의 자신감의 근거는 도데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 사람의 막연한 말과 열렬한 소원에 있을 뿐인 것이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민숙은 연희에게 닥쳐 올 앞날들을 생각해 보면 아직도 기가 막히고 걱정스러웠지만
그러면서도 두 사람의 모습이 자연스럽고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면서
준호에 대한 낙인이 응고되지 못하고 떨어져 나가게 될 것이란 예감에 불안해졌다.
멀리서 연희의 아파트가 모습을 드러내자 준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고
아쉬움이 가득 차오르는 것이 보였다.
준호는 연희를 만난 이후 연희와 끊겨져 있는 시간들이 제일 힘겨웠다.
그 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고 게다가 내일은 주말이었다.
-내일 집에 가시죠? 조심운전 하세요.
아파트 정문에 다다르자 잡은 손을 놓으며 연희가 의례적 인사말을 했다.
준호는 굳어진 얼굴과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 했다.
한 여름 밤의 꿈처럼 매혹은 사라지고 현실이 앞에 놓였다.
준호는 (나는 너와 헤어지기 싫다. 그래서 내일 집에 가지 않겠다.
너와 함께 계속 여기에 머무르고 싶다)고 털어놓지 않은 자신에게 속으로 화를 냈다.
그러나 연희는 알 수 있었다.
준호의 그런 마음을....
준호가 시야에서 멀어지는 것을 보며
연희는 바람에 섞여 불분명하게 들려오는 거리의 음악소리를 듣고 있었다.
-뭘 생각하니?
민숙이 한동안의 침묵을 깨며 묻자
연희가 비스듬한 시선을 재빨리 던지며 말했다.
-술 한 잔 할래?
민숙은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오늘은 독한 술이 필요할 것 같아.
밤공기는 열린 창문을 통해 집 안으로 기분 좋게 스며들고 있었다.
이따금씩 회오리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연희는 글라스에 얼음을 듬뿍 넣고 위스키를 반쯤 따른 후 민숙에게 건냈다.
실내등을 끄고 스텐드를 켜자 그윽한 조명을 받아 두 사람의 얼굴 윤곽은
밝음과 어둠으로 극명하게 대조되어 더 뚜렷하고 강한 인상을 풍겼다.
민숙이 이제는 다 털어놓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시선으로 연희를 쳐다보자
연희는 주저하면서 말했다.
-사람이 처음에는 몹시 혐오를 가지고 시작한 일에 마침내 익숙해져 버린다는 것 아니겠어.
연희는 여기까지 말하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겨우 덧붙여 말했다.
-너를 이해시킬 자신이 없어. 실은 나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겠거든.
-그렇다면, 내가 묻는 말에 대답은 할 수 있겠지?
-....
-그 사람과 잤니?
연희가 시선을 아래로 두고 머뭇거리다 힘겹게 대답했다.
-....응.
-맙소사! 벌써 그랬단 말이구나.
민숙은 단지 자기가 열심히 묻는 것에 대한 대답으로서
담담하게 연희가 말해주는 보고로 몹시 큰 충격에 빠졌다.
그것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연희가 남자 때문에
이토록 흔들리는 모습을 본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민숙은 위스키를 몇 모금 꿀꺽꿀꺽 들이키더니 다소 격양된 어조로 말했다.
-우리 아빠, 바람피우느라 엄마 속 썩이고 반평생을 집 밖으로 전전하다가
말년에 외톨이 되어서 작년에 목 매달아 자살한 거 너도 알지?
내가 네 편을 들어주길 바라니?
연희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다가 목이 메는 소리로 겨우 말했다.
-미안해..
-우리 집 이야기로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어.
단지 나는 네가 그 누구의 불행에도 일조하는 일이 없게 되길 바랄 뿐이야.
하지만 지금은 얘기를 더 듣고 싶어.
연희는 저주가 가슴 깊은 곳으로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사람들은 마치 극장에서처럼 모든 것이 질서정연하게 진행 될 거라고 생각해.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자기가 리얼리스트라고 생각하고 있어.
민숙아, 난 마치 조용히 길을 걷다 무방비 상태에서 트럭에 치인 사람 같아.
그 사람에게 가정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을 때는 모든 것이 간단하고 여지없어 보였어.
그런데 내가 그 사람 곁에 있을 때면 나는 부자유스러워 지고
그 사람의 무언가로부터 통제를 당하는 느낌이 들어.
그 사람은 나를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몰아가.
그 사람은 나를 수줍은 소녀로 만들어놓고
동시에 성숙한 여자만이 할 수 있는 결단을 나로부터 요구해.
-그 사람을 사랑하니? 사랑해서 잔거니?
-글쎄.. 잘 모르겠어. 그것 보다는..
연희는 무안한 얼굴과 자기를 불쾌하게 생각하는 기분이 되어 엄지손톱을 깨물며 말했다.
-나는 다만 나와 그 사람을 시험해 보고 싶었을 뿐이었어.
그 사람에게서 나 자신을 재어 보고 싶을 뿐이었어.
섹스는 다만 외관상의 결합일 뿐이야.
그런데도 남자들 대부분의 궁극의 목적이 섹스라는 것도 나는 알고 있어.
그래서 나는 그 카드를 사용한 것에 지나지 않아.
그 사람이 너무 쉽게 빨리 목적을 달성해버린다면
모든 게 명백하게 판가름날거라 생각했던 거야.
하지만 그건 최면에 불과했어. 어리석은 짓이 되고 말았어.
-어쩜 좋아! 너 그 사람에게 단단히 빠져버렸구나!
연희가 부정하는 표정으로 반박하려 하자 민숙이 재빠르게 가로채며 덧붙였다.
-그 사람의 무엇이 널 이렇게 끌리게 만든 거니?
연희가 글라스를 만지작거리며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그렇게도 많은 괴물들 사이에서 단 하나의 느낄 줄 아는 가슴의 소유자인 것 같아.
그 사람은 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게 만들어진 인간인 것 같아.
-어떤 이유를 빙자한다고 해도 유부남과의 관계가 정당화 될 수는 없는 거야.
민숙이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그래 맞아.
연희는 힘없이 우울하게 긍정했다.
연희는 냉담이나 애정에 넘친 인내라고 볼 수 있는 조용한 태도로
민숙의 적개심을 받아들였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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