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방에서 뛰쳐나온 후 연희는 차라리 다행스런 일이었는지 모른다고 자위하며
정말 그만둬야겠다고 결정했다.
흥미를 잃어버리기 위한 저의 있는 정리는
평화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것 같은 안도를 주었다.
그런데 한 달 후, 연희는 또 준호와 마주 앉아 있다.
메일함에서 서준호라는 이름을 발견했을때 곧바로 삭제버튼을 누를 수 없었던 건
(레포트)라는 제목때문이었다.
준호는 말 잘 듣는 학생처럼 정말 과제를 제출한 것이었다.
연희에게 선생님이라는 위치는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기 보다는
아이들에게 무언가 줄 수 있다는 흡족함으로 찾은 피난처였다.
연희는 정말로 아이들이 사랑스러웠다.
간혹 수업이 아닌 다른 때에 아이들과 마주치게 되면 반듯이
-선생님~~
이란 호명과 함께 달려드는 개구지고 구김이 없는 모습들에
연희는 (선생님이 되길 얼마나 잘 하였는가)라고 생각하며
불행했던 자기의 유년시절을 투사시키는 것이었다.
밝은 아이들의 현재를 공유하는 것으로 자기의 과거로부터 탈출하는 달가움은
결핍의 치료였고 연희에게 있어 유일한 행복이기도 했다.
생명이 없는 그저 활자일 뿐인 세 글자였지만, 거기서 연희는 이와 같은 익숙한 냄새를 맡았다.
처음 만난 날 준호가 자기의 얼굴을 천천히 오랫동안 만졌을 때,
두 번째로 만난 날 포옹하고 키스하며 저질스러운 스킨쉽을 했을 때
연희는 무언가 이상하고 생소한 준호의 본질을 포착했다.
그러나 그 본질의 촉감은 가장자리에 불과했다.
포착할 수 있는 바깥의 가장자리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준호의 글 속에서 세 번 째로 그것을 느꼈을 때
연희는 진짜를 포착하고 싶었다.
(도대체 이 남자의 부도덕에 대한 뻔뻔스러움은 무엇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일까.
미숙해 보이는 한 남자의 껍질을 벗겨내면 어떤 능숙한 비범함이 발견되는 것일까)
준호에게 동의를 구하지도 않고 데낄라를 주문한 연희는
시선을 테이블에 고정한 채
-마시겠어요? 라고 중얼거리면서 술잔에 철철 넘게 따르더니 단숨에 마셔버렸다.
-연희씨...
라고 준호는 걱정스러움을 실어 말했다.
-그럼 어때서요. 지금은 마시겠어요.
당신이 마음대로 급작스럽게 해버린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않나요.
그보단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당신의 과거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던 거죠?
적의가 느껴지는 순간에는 (당신)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버릇이 연희에겐 있었다.
-당신에겐 유감인지 몰라도 나에겐 이야기를 들을 충분한 시간이 있어요.
일부러 비밀을 캐내려고 노력하지는 않겠지만 나는 알고 싶고,
그래서 당신에게 말 할 기회를 주는 거예요.
연희는 얼핏 기묘하게 심각한 어조로 덧붙여 말했다.
준호는 기습적인 질문에 당황하지 않았지만 준비되어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말해야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도 준호는 대각선으로 보이는 건너편 테이블에 앉은 남자의 시선을 의식하며
짜증을 섞어 천진하게 투정하듯 엉뚱한 말을 했다.
-저 남자 마음에 안 들어요.
나는 연희씨를 앞에 두고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는데
저 남자는 우리가 들어오고부터 줄곧 연희씨만 쳐다보고 있어요. 감히...
연희는 고개를 돌려 잠깐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 중년의 남자는 앞에 여자를 두고서도
혼자 온 것처럼 연희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는데
연희와 눈이 마주친 순간에도 그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연희는 따분한 표정으로 다시 자세를 바로 하고 빈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우리가 만일 연인이고 내가 당신의 입장이라면 저 남자가 보는 앞에서 키스하겠어요.
연희는 오른쪽 입술에 희미하게 힘을 주며 내뱉듯이 말했다.
그것은 조소였고 두 남자 모두를 향한 것이었다.
연희가 데낄라 한 잔을 또 따라 마시려 할 때
준호는 연희의 손을 잡아 그러지 못하도록 하면서 말했다.
-나는 거짓말을 하고도 죄책감 같은 걸 느끼지 않아요.
이건 어떤 사람과의 오랜 관계 때문일거에요....
준호는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무미건조한 어조로
자기 이야기를 시작했다.
연희는 이야기를 경청하며 이 남자가 겪은 일들은
이 남자의 기품있는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꼈다.
그리고 자기가 이성이 명하는 대로 통제하는 것이 참된 행동인지
또는 준호가 내 옆에 있음으로 해서 일깨워지는
이 의심스럽고 예측할 수 없고 유혹자적이고 비밀스럽게 폭력적인,
나쁜 자아를 인정하고 솔직해지는 것이 참 행동인지 알 수가 없었다.
준호는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비정상적인 선생님과의 관계 이후로 나는 사랑을 포기해버렸어요.
시도도 해보았지만 번번히 실패했죠.
떠밀리듯 결혼했지만 결혼생활이 나를 구제해 줄 것이라 기대하지는 않았어요.
아내는 나를 선택했고, 나는 비겁하게 비밀을 털어놓지도 못하고
아내가 좀 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못한 상태로 결혼을 승낙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무미건조함은 언제까지나 계속 될거고,
사람들은 나를 바람둥이라 부르겠지만, 사실 나는 바람둥이도 못 되는 인간입니다.
나는 그냥 성도착증 환자일 뿐, 연애 따위에는 관심도 없고 배설만 하면 그 뿐인....
이건 나에게 일종의 show와 같은 것이죠.
흔한 여자들은 어디에서나 쉽게 만날 수 있고
나는 내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 별로 어려움이 없었어요.
여자들은 그저 최고소리를 듣게 해주면 되는 거니까요.
사막의 모래폭풍 같은 섹스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늘 읊조리죠.
The show must go on... 이라고..
연희는 패배를 자인하고 무기를 내던져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 패배에는 흥분과 공감의 맛이 배어 있었다.
연희는 그 감정을 준호에게 아직은 들키고 싶지 않았다.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연희는 낮은 어조로 말하며 일어섰다.
연희는 화장실 세면대에 기대어
접은 왼 팔에 오른팔을 괴고 주먹 쥔 손의 엄지손톱으로 아랫입술을 누르며
열 두 살 소년, 소녀의 약탈된 시간이 겹쳐진 거리를 걸었다.
연희는 자기의 본심을 읽고 싶었다.
연희는 또 하나의 보다 어려운 자아가 야만의 고개를 들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을 것이지만
준호의 과거를 알고도 이전과 다를 바가 없다면
그것은 준호에게 있어 모욕일 것이라 생각했다.
예의바른 무관심 보다는 차라리 증오가 더 달가운 것 아닌가.
준호는 연희가 자리를 비운 동안 아까의 그 남자를 노골적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연희의 외모는 누구의 시선이라도 끌 수 있을 만큼 매력적이었지만,
그래서 유부남인 주제에 연희의 인생에 끼어들고 있는 자기에 비한다면
저기의 남자가 던지는 느끼한 시선은 같은 남자로서 차라리 공감할 만한 것이기도 했지만
준호는 단순하게 남자를 혼내주어야 한다는 생각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준호는 남자가 앉은 테이블을 돌아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연희를 보자
본능적인 방법을 찾아내었다.
연희가 맞은 편 소파에 앉으려고 스커트의 뒷자락을 양손으로 매만지며
허리를 약간 구부렸을 때,
준호는 연희의 왼팔을 잡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연희는 휙 돌려져 털썩 주저앉으며 준호와 밀착됐다.
-지금 무슨.......
연희가 끝까지 말하기도 전에
준호는 연희의 양 볼을 손으로 감싸고 처음 그랬던 것 보다도 더 강하게 키스 했다.
일종의 그 남자에 대한 분노가 연희를 향한 애정 속에 섞여 있는 것 같았다.
연희는 이번에야 말로 완전히 승복하고 두 눈을 꼭 감았다.
사람들이 쳐다보았고
연희와 준호는 서로 깊이 사랑하는 연인임에 틀림이 없는 것으로 비춰졌다.
연희는 더 이상 그곳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가고 싶은 곳이 있어요. 함께 가 주실 건가요?
연희의 말투는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고
준호는 안도의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 했다.
연희가 준호를 데리고 간 곳은 소울벙커라는 카페 겸 클럽이었다.
Y대에 근처에 위치한 그곳은
평소에는 카페이지만 금요일 밤 10시부터 다음날 새벽 5시 까지는
힙합클럽으로 운영되는 곳이었다.
30평쯤 되는 넓지 않은 클럽 안은 하나의 거대한 엠프처럼 청춘을 담고 들썩이고 있었다.
종종 외국 사람도 눈에 띄었는데 그들은 연희를 보고 윙크하거나 휘파람을 불었다.
연희는 하이네켄 세 병을 주문하고는 그것이 나오기도 전에 준호를 이끌어 스테이지로 나갔다.
소리의 파장이 심장을 두드리는 것 같이 크게 울려퍼지며
있었던 모든 일을 집어삼키고 청춘을 흐느적거리게 만드는 것 같다고 준호는 생각했다.
연희가 양손을 확성기 모양으로 만들어 입에 대고 소리쳤다
-나는 스트레스를 가끔 춤추는 것으로 풀어요. 준호씨는 춤추는 거 좋아해요?
-이럴 줄 알았으면 춤을 좀 배워두는 건데 그랬어요.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리듬에 맞춰 능숙하게 움직이는 연희와 달리
한 번도 춤을 춰 본 일이 없는 준호는 엉거주춤하고 뻣뻣한 모양으로 서서는,
연희가 따라가는 리듬에 맞춰 박수만 치고 있었다.
연희는 그 모습이 무척이나 촌스러워 보였지만 그러면서 귀엽기도 했다.
담배연기 자욱한 지하 클럽의 몽환적인 열기가 연희의 정신을 용해시킨 것이었을까.
연희에게서 갑자기 짓궂은 충동이 생겨났다.
연희는 화장실을 다녀오겠다고 말하곤 재빠르게 1층 화장실로 올라갔다.
연희는 찬 물에 세수를 하고 묶었던 긴 머리를 풀어헤쳤다.
그리고 거울 속 자기의 모습을 응시했다.
연희는 뭔가 드디어 마음 먹은 듯 결심에 찬 얼굴로 스테이지로 돌아갔다.
연희가 없는 동안에도 준호는 테이블로 돌아가지 않고
스테이지 정 가운데에서 아까의 어리숙한 모습 그대로 서 있었다.
돌아가지 않았다기 보다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그 바보같은 사랑스러운 모습에 연희는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연희는 정말 깔깔거리며 웃어버렸다.
곧이어 연희는 준호에게 달려들 듯 다가가 양 팔을 준호의 어깨 위에 두르고 키스했다.
그 순간엔 모든 게 돌고 있었다.
음악은 공간을 돌고 돌아 귓전을 때렸고,
스테이지도 돌고 가득찬 사람들도 돌고 있었다.
그러더니 모든 것은 멈춰버리고 다시 준호와 연희가 돌았다.
마치 360도로 돌며 찍는 카메라가 정 반대의 플레임을 번갈아 가며 연출하고 있는 것 같이....
연희가 준호에게 하는 일은 20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연희는 시원한 바람을 쏘이고 싶어졌다.
연희와 준호는 퇴폐스러운 쾌락의 무도장에서 벗어나 밖으로 나갔다.
아주 굵은 쇠파이프를 디귿자로 구부려 만든 벤치에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았다.
바람을 쏘이자 연희는 갑자기 차가운 안정과 손잡은 듯 다시 잠잠해 졌다.
준호는 연희의 그런 변화에 불안함을 느꼈다.
귀에 들릴 듯 깊은 침묵이 한동안 이어졌다.
그러나 연희는 침묵 속에서 생각하고 있었다.
연희는 그것을 읽었다.
그것은 연희의 본심이었고 하나의 위험한 실험이었다.
연희는 고개를 들어 준호를 바라봤고 시선을 부딪혔다.
그것은 공범자들의 시선이었다.
놓쳐버린 청춘, 놓쳐버린 놀음과 어리석은 짓의 유쾌한 입김이 연희를 스치고 지나갔다.
경박과 대담의 맛이 따르는 일종의 도취가 연희와 준호를 한 갈래의 길에서 동반했다.
(만일 준호가 그동안 자기가 만나왔던 그저그런 흔한 여자들과 내가 다를바 없다고 인식하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러면 나는 지루한 잡지책 같은 여자가 되어버리는 걸까)
연희가 드디어 침묵을 깨고 말했다.
-나랑 섹스하고 싶어요?
그것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는 질문이었다.
연희의 질문은 준호를 당황케 했지만, 준호가 적당한 대답을 찾아내려고 애쓰는 동안
연희는 준호를 아주 침착하게 바라보더니
조금 전의 즐거운 광채를 얼굴에서 거둬들이며 말했다.
-자 이제 가요. 불륜의 섹스가 어울리는 곳으로....
정말 그만둬야겠다고 결정했다.
흥미를 잃어버리기 위한 저의 있는 정리는
평화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것 같은 안도를 주었다.
그런데 한 달 후, 연희는 또 준호와 마주 앉아 있다.
메일함에서 서준호라는 이름을 발견했을때 곧바로 삭제버튼을 누를 수 없었던 건
(레포트)라는 제목때문이었다.
준호는 말 잘 듣는 학생처럼 정말 과제를 제출한 것이었다.
연희에게 선생님이라는 위치는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기 보다는
아이들에게 무언가 줄 수 있다는 흡족함으로 찾은 피난처였다.
연희는 정말로 아이들이 사랑스러웠다.
간혹 수업이 아닌 다른 때에 아이들과 마주치게 되면 반듯이
-선생님~~
이란 호명과 함께 달려드는 개구지고 구김이 없는 모습들에
연희는 (선생님이 되길 얼마나 잘 하였는가)라고 생각하며
불행했던 자기의 유년시절을 투사시키는 것이었다.
밝은 아이들의 현재를 공유하는 것으로 자기의 과거로부터 탈출하는 달가움은
결핍의 치료였고 연희에게 있어 유일한 행복이기도 했다.
생명이 없는 그저 활자일 뿐인 세 글자였지만, 거기서 연희는 이와 같은 익숙한 냄새를 맡았다.
처음 만난 날 준호가 자기의 얼굴을 천천히 오랫동안 만졌을 때,
두 번째로 만난 날 포옹하고 키스하며 저질스러운 스킨쉽을 했을 때
연희는 무언가 이상하고 생소한 준호의 본질을 포착했다.
그러나 그 본질의 촉감은 가장자리에 불과했다.
포착할 수 있는 바깥의 가장자리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준호의 글 속에서 세 번 째로 그것을 느꼈을 때
연희는 진짜를 포착하고 싶었다.
(도대체 이 남자의 부도덕에 대한 뻔뻔스러움은 무엇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일까.
미숙해 보이는 한 남자의 껍질을 벗겨내면 어떤 능숙한 비범함이 발견되는 것일까)
준호에게 동의를 구하지도 않고 데낄라를 주문한 연희는
시선을 테이블에 고정한 채
-마시겠어요? 라고 중얼거리면서 술잔에 철철 넘게 따르더니 단숨에 마셔버렸다.
-연희씨...
라고 준호는 걱정스러움을 실어 말했다.
-그럼 어때서요. 지금은 마시겠어요.
당신이 마음대로 급작스럽게 해버린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않나요.
그보단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당신의 과거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던 거죠?
적의가 느껴지는 순간에는 (당신)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버릇이 연희에겐 있었다.
-당신에겐 유감인지 몰라도 나에겐 이야기를 들을 충분한 시간이 있어요.
일부러 비밀을 캐내려고 노력하지는 않겠지만 나는 알고 싶고,
그래서 당신에게 말 할 기회를 주는 거예요.
연희는 얼핏 기묘하게 심각한 어조로 덧붙여 말했다.
준호는 기습적인 질문에 당황하지 않았지만 준비되어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말해야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도 준호는 대각선으로 보이는 건너편 테이블에 앉은 남자의 시선을 의식하며
짜증을 섞어 천진하게 투정하듯 엉뚱한 말을 했다.
-저 남자 마음에 안 들어요.
나는 연희씨를 앞에 두고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는데
저 남자는 우리가 들어오고부터 줄곧 연희씨만 쳐다보고 있어요. 감히...
연희는 고개를 돌려 잠깐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 중년의 남자는 앞에 여자를 두고서도
혼자 온 것처럼 연희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는데
연희와 눈이 마주친 순간에도 그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연희는 따분한 표정으로 다시 자세를 바로 하고 빈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우리가 만일 연인이고 내가 당신의 입장이라면 저 남자가 보는 앞에서 키스하겠어요.
연희는 오른쪽 입술에 희미하게 힘을 주며 내뱉듯이 말했다.
그것은 조소였고 두 남자 모두를 향한 것이었다.
연희가 데낄라 한 잔을 또 따라 마시려 할 때
준호는 연희의 손을 잡아 그러지 못하도록 하면서 말했다.
-나는 거짓말을 하고도 죄책감 같은 걸 느끼지 않아요.
이건 어떤 사람과의 오랜 관계 때문일거에요....
준호는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무미건조한 어조로
자기 이야기를 시작했다.
연희는 이야기를 경청하며 이 남자가 겪은 일들은
이 남자의 기품있는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꼈다.
그리고 자기가 이성이 명하는 대로 통제하는 것이 참된 행동인지
또는 준호가 내 옆에 있음으로 해서 일깨워지는
이 의심스럽고 예측할 수 없고 유혹자적이고 비밀스럽게 폭력적인,
나쁜 자아를 인정하고 솔직해지는 것이 참 행동인지 알 수가 없었다.
준호는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비정상적인 선생님과의 관계 이후로 나는 사랑을 포기해버렸어요.
시도도 해보았지만 번번히 실패했죠.
떠밀리듯 결혼했지만 결혼생활이 나를 구제해 줄 것이라 기대하지는 않았어요.
아내는 나를 선택했고, 나는 비겁하게 비밀을 털어놓지도 못하고
아내가 좀 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못한 상태로 결혼을 승낙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무미건조함은 언제까지나 계속 될거고,
사람들은 나를 바람둥이라 부르겠지만, 사실 나는 바람둥이도 못 되는 인간입니다.
나는 그냥 성도착증 환자일 뿐, 연애 따위에는 관심도 없고 배설만 하면 그 뿐인....
이건 나에게 일종의 show와 같은 것이죠.
흔한 여자들은 어디에서나 쉽게 만날 수 있고
나는 내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 별로 어려움이 없었어요.
여자들은 그저 최고소리를 듣게 해주면 되는 거니까요.
사막의 모래폭풍 같은 섹스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늘 읊조리죠.
The show must go on... 이라고..
연희는 패배를 자인하고 무기를 내던져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 패배에는 흥분과 공감의 맛이 배어 있었다.
연희는 그 감정을 준호에게 아직은 들키고 싶지 않았다.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연희는 낮은 어조로 말하며 일어섰다.
연희는 화장실 세면대에 기대어
접은 왼 팔에 오른팔을 괴고 주먹 쥔 손의 엄지손톱으로 아랫입술을 누르며
열 두 살 소년, 소녀의 약탈된 시간이 겹쳐진 거리를 걸었다.
연희는 자기의 본심을 읽고 싶었다.
연희는 또 하나의 보다 어려운 자아가 야만의 고개를 들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을 것이지만
준호의 과거를 알고도 이전과 다를 바가 없다면
그것은 준호에게 있어 모욕일 것이라 생각했다.
예의바른 무관심 보다는 차라리 증오가 더 달가운 것 아닌가.
준호는 연희가 자리를 비운 동안 아까의 그 남자를 노골적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연희의 외모는 누구의 시선이라도 끌 수 있을 만큼 매력적이었지만,
그래서 유부남인 주제에 연희의 인생에 끼어들고 있는 자기에 비한다면
저기의 남자가 던지는 느끼한 시선은 같은 남자로서 차라리 공감할 만한 것이기도 했지만
준호는 단순하게 남자를 혼내주어야 한다는 생각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준호는 남자가 앉은 테이블을 돌아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연희를 보자
본능적인 방법을 찾아내었다.
연희가 맞은 편 소파에 앉으려고 스커트의 뒷자락을 양손으로 매만지며
허리를 약간 구부렸을 때,
준호는 연희의 왼팔을 잡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연희는 휙 돌려져 털썩 주저앉으며 준호와 밀착됐다.
-지금 무슨.......
연희가 끝까지 말하기도 전에
준호는 연희의 양 볼을 손으로 감싸고 처음 그랬던 것 보다도 더 강하게 키스 했다.
일종의 그 남자에 대한 분노가 연희를 향한 애정 속에 섞여 있는 것 같았다.
연희는 이번에야 말로 완전히 승복하고 두 눈을 꼭 감았다.
사람들이 쳐다보았고
연희와 준호는 서로 깊이 사랑하는 연인임에 틀림이 없는 것으로 비춰졌다.
연희는 더 이상 그곳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가고 싶은 곳이 있어요. 함께 가 주실 건가요?
연희의 말투는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고
준호는 안도의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 했다.
연희가 준호를 데리고 간 곳은 소울벙커라는 카페 겸 클럽이었다.
Y대에 근처에 위치한 그곳은
평소에는 카페이지만 금요일 밤 10시부터 다음날 새벽 5시 까지는
힙합클럽으로 운영되는 곳이었다.
30평쯤 되는 넓지 않은 클럽 안은 하나의 거대한 엠프처럼 청춘을 담고 들썩이고 있었다.
종종 외국 사람도 눈에 띄었는데 그들은 연희를 보고 윙크하거나 휘파람을 불었다.
연희는 하이네켄 세 병을 주문하고는 그것이 나오기도 전에 준호를 이끌어 스테이지로 나갔다.
소리의 파장이 심장을 두드리는 것 같이 크게 울려퍼지며
있었던 모든 일을 집어삼키고 청춘을 흐느적거리게 만드는 것 같다고 준호는 생각했다.
연희가 양손을 확성기 모양으로 만들어 입에 대고 소리쳤다
-나는 스트레스를 가끔 춤추는 것으로 풀어요. 준호씨는 춤추는 거 좋아해요?
-이럴 줄 알았으면 춤을 좀 배워두는 건데 그랬어요.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리듬에 맞춰 능숙하게 움직이는 연희와 달리
한 번도 춤을 춰 본 일이 없는 준호는 엉거주춤하고 뻣뻣한 모양으로 서서는,
연희가 따라가는 리듬에 맞춰 박수만 치고 있었다.
연희는 그 모습이 무척이나 촌스러워 보였지만 그러면서 귀엽기도 했다.
담배연기 자욱한 지하 클럽의 몽환적인 열기가 연희의 정신을 용해시킨 것이었을까.
연희에게서 갑자기 짓궂은 충동이 생겨났다.
연희는 화장실을 다녀오겠다고 말하곤 재빠르게 1층 화장실로 올라갔다.
연희는 찬 물에 세수를 하고 묶었던 긴 머리를 풀어헤쳤다.
그리고 거울 속 자기의 모습을 응시했다.
연희는 뭔가 드디어 마음 먹은 듯 결심에 찬 얼굴로 스테이지로 돌아갔다.
연희가 없는 동안에도 준호는 테이블로 돌아가지 않고
스테이지 정 가운데에서 아까의 어리숙한 모습 그대로 서 있었다.
돌아가지 않았다기 보다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그 바보같은 사랑스러운 모습에 연희는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연희는 정말 깔깔거리며 웃어버렸다.
곧이어 연희는 준호에게 달려들 듯 다가가 양 팔을 준호의 어깨 위에 두르고 키스했다.
그 순간엔 모든 게 돌고 있었다.
음악은 공간을 돌고 돌아 귓전을 때렸고,
스테이지도 돌고 가득찬 사람들도 돌고 있었다.
그러더니 모든 것은 멈춰버리고 다시 준호와 연희가 돌았다.
마치 360도로 돌며 찍는 카메라가 정 반대의 플레임을 번갈아 가며 연출하고 있는 것 같이....
연희가 준호에게 하는 일은 20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연희는 시원한 바람을 쏘이고 싶어졌다.
연희와 준호는 퇴폐스러운 쾌락의 무도장에서 벗어나 밖으로 나갔다.
아주 굵은 쇠파이프를 디귿자로 구부려 만든 벤치에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았다.
바람을 쏘이자 연희는 갑자기 차가운 안정과 손잡은 듯 다시 잠잠해 졌다.
준호는 연희의 그런 변화에 불안함을 느꼈다.
귀에 들릴 듯 깊은 침묵이 한동안 이어졌다.
그러나 연희는 침묵 속에서 생각하고 있었다.
연희는 그것을 읽었다.
그것은 연희의 본심이었고 하나의 위험한 실험이었다.
연희는 고개를 들어 준호를 바라봤고 시선을 부딪혔다.
그것은 공범자들의 시선이었다.
놓쳐버린 청춘, 놓쳐버린 놀음과 어리석은 짓의 유쾌한 입김이 연희를 스치고 지나갔다.
경박과 대담의 맛이 따르는 일종의 도취가 연희와 준호를 한 갈래의 길에서 동반했다.
(만일 준호가 그동안 자기가 만나왔던 그저그런 흔한 여자들과 내가 다를바 없다고 인식하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러면 나는 지루한 잡지책 같은 여자가 되어버리는 걸까)
연희가 드디어 침묵을 깨고 말했다.
-나랑 섹스하고 싶어요?
그것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는 질문이었다.
연희의 질문은 준호를 당황케 했지만, 준호가 적당한 대답을 찾아내려고 애쓰는 동안
연희는 준호를 아주 침착하게 바라보더니
조금 전의 즐거운 광채를 얼굴에서 거둬들이며 말했다.
-자 이제 가요. 불륜의 섹스가 어울리는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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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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