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지붕들은 기울어지는 태양을 붙잡으려는 듯 있는 힘을 다해 빛나고 있었다.
레스토랑은 사람들로 붐볐다.
준호는 많은 사람들 중에서 연희를 금방 찾아냈다.
그러나 곧 다가가 말을 걸지 못했다.
그것은 아마 연희가 그렇게도 생각에 깊이 잠긴 쌀쌀한 얼굴을 하고 책을 펼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번은 웬 남자가 말을 걸었으나 연희는 대답조차도 하지 않았다.
누가 문을 열고 들어올 때마다 연희는 잠깐 쳐다보고는 점점 어두운 표정을 띠면서 다시 책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연희가 한참 동안이나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언제나 같은 페이지였다.
준호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연희가 자기를 알아볼 때 까지 가만히 서 있었다.
연희에게 만나자는 연락이 왔을 때 준호는 반갑기 보다 오히려 겁이 났다.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적중률이 높다.
엄숙한 연희의 얼굴이 그것을 확인시켜 주고 있었다.
그 순간에 준호는 연희가 혼란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일찍 나오셨네요? 저는 읽을거리가 있어서 한참 전에 나와 있었어요.
기척을 느낀 연희가 고개를 들고 무뚝뚝하게 말했다.
-오늘은 차를 가지고 왔어요. 드라이브 좋아하세요?
준호가 주눅이 든 표정으로 말했다.
-아직 학생인데 편하게 생활하시네요.
- 제 능력은 아니고, 아이엄마 덕분이지요.
연희는 이렇게 말하는 준호가 조금 뻔뻔스럽게 느껴졌다.
그리곤 다시 이어서 말을 하려는데 준호가 재빠르게 먼저 말했다.
-사랑해요
연희는 미소지었다.
그 미소에는 약간의 조롱과 우월감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무언지 모르게 감동시키는 것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우수에 찬 미소였다.
연희가 아무 대답도 안 하고 대화를 계속할 의향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준호가 그것을 해야만 했다.
-가을학기에 쫑파티를 하는데 같이 가주시겠어요?
연희는 동그랗게 눈을 뜨며 어깨를 추켜 세웠다.
-교수님이나 학생들 보는 앞에서 저와 커플로 쫑파티에 등장하시겠다니. 제정신이세요?
-저는 단지 제가 하고 싶은 일을 말하는 것뿐이에요. 사람들이 어떻게 쳐다보든 상관없어요.
연희는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얘기를 하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연희는 그렇게 말하지 못할 것이라는 걸 직감하고 이마를 습기 있는 차가운 유리창에 대었다.
준호는 순간 연희를 꼭 끌어안고 싶다는 욕망이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났다.
연희는 스스럼없이 하고 싶은 말을 해버리고 마는 철없는 아이와 같은 준호에게서 오히려 비범함을 느꼈다.
-노래 부르러 가실래요? 봄이여 오라 연습 많이 했는데 들어주실래요?
준호가 일부러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연희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렇다고 거절하지도 못했다.
동경에 찬 욕망이 속에서 깨어났다.
준호와 계속 만나는 것으로 무한한 황무지가 자기 앞에 입을 벌리고 있다 할지라도
오랜 세월 연애에 대한 냉담의 지배가
준호와 함께 있는 동안에는 허물어지게 되는 신기한 경험을 뿌리치기가 힘들었다.
그것은 결정적인 호기심 같은 것이었다.
준호와 연희가 싸구려 인테리어의 지하 노래방에서 드디어 단 둘이 있게 됐을 때
흔하게 상상할 수 있는 어떤 일은 일어나고 말았다.
천정에서 어지럽게 뱅뱅 돌아가는 삼원색의 조명 아래서
준호는 한참 동안이나 노래 불렀다.
연희는 그 천진한 모습을 신기한 듯이 쳐다보았다.
준호가 봄이여 오라를 세 번이나 부르고 네 번째로 다시 부르려 할 때
지칠 줄 모르는 준호를 저지하려고 연희가 일어나 스톱버튼을 누르려 하는 순간
준호가 연희를 와락 끌어안았다.
얼마나 세게 끌어안았는지 연희는 가슴이 답답하고 제대로 숨도 쉬어지지 않았다.
아는지 모르는지 준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 곡의 노래 반주가 끝나가도록 연희를 결박에서 풀어주지 않았다.
연희는 자포자기 하고 오른쪽 볼을 준호의 왼쪽 어깨에 기댔다.
준호가 갑자기 연희를 벽 쪽으로 밀어붙이더니 기습적으로 키스를 했다.
연희의 꼭 다물어진 입술이 열리자 준호가 연희의 두 다리 사이로 자기의 오른쪽 다리를 밀어넣었다.
연희의 얼굴은 회를 칠한 담벼락 같이 흰 얼굴빛이 되었다.
연희는 반사적으로 준호를 밀치고 거칠게 소리쳤다.
-저리 비키지 못해요!
연희는 갑자기 모든 게 뻔하고 시시해졌다.
숄더백을 낚아채 서둘러 준호에게서 도망친 연희는 차를 타지 않고 걸었다.
목적지가 집인지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엄격하게, 자극적으로 자기의 잘못에 대해 질책하면서 계속 걸었다.
그러나 곧이어 연희는 자기의 조롱하는 듯한 어조가 준호를 놀라게 할 수 없고
오히려 견고하게 만들고 있는 것을 느끼고 참을 수 없는 혼란에 빠졌다.
연희가 노래방에서 화를 내며 순식간에 모든 것을 끝장내버리려는 듯 행동했을 때도
준호는 동요하지 않고 잠잠히 서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어쩌면 서로의 입장이 교차하는 동안 공정한 바른 태도인지도 몰랐다.
연희는 조금 전 준호가 빼앗았던 입술을 검지로 만지작거렸다.
얼굴이 붉어지는 것 같았다.
질주하는 자동차의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는 도로 속으로
달콤하게 느껴버린 키스의 기억을 내팽개치고 싶었다.
준호는 기숙사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연희의 신비스러운 적의와 끈기 있고 피곤한 자기 주장 사이의 넓은 길을 재어보았다.
준호는 자기의 이기심이 잘못에 잘못을 거듭하고 맨 끝에는 고독만이 남는다고 할지라도
그쳐지지 않을 일이라고 생각했다.
준호는 또 힘을 다해서 주문을 걸었다.
(연희도 언젠가는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날이 올거야. 연희가 떠나지 않고 언제까지나 내 곁에 머문다면...)
준호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연희를 사랑하는 것은 흔들림이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 말에 신뢰를 받을 수 없는 현실적인 자기의 처지가 먹먹했다.
기숙사로 돌아가자 룸메이트 정수가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준호는 정수를 흔들어 깨웠다.
-형, 일어나요. 할 말이 있어요.
-임마, 피곤해. 내일 이야기 하자.
정수가 갑자기 켜진 형광등 불빛에 눈살을 찌푸리며 시계를 보고 짜증스럽게 말했지만
침울한 준호의 얼굴을 보더니 심각성을 알아차리고 잠이 확 깨버린다는 듯 일어났다.
-무슨 일인데 곧 죽게 생긴 사람처럼 이래?
준호는 냉장고에 먹다가 반쯤 남겨둔 소주를 물컵에 모두 따라 꿀꺽꿀꺽 들이켰다.
-형, 나 만나는 여자 있어요.
-임마 니가 만나는 여자가 어디 한 둘이었어? 새삼스럽게 왜 이러냐.
정수가 김샌다는 말투로 말했다.
-그 여자를 사랑해요. 그런데 그 여자가 내 마음을 너무 몰라줘요.
-어쭈 이 자식 쑈하고 있네.
정수는 준호 같은 사람의 넋을 단숨에 빼놓은 여자는 필시 여우일 것이라 판단하고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야 임마, 그거 석 달 정도 지나면 다 시들해져. 남녀상열지사라는 게 다 거기서 거기야.
준호는 연희 이전에 여러 종류의 여자들과 연이 닿으면
아무렇게나 연애하고 쉽게 헤어지는 바람둥이였기 때문에
정수의 이런 태도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것을 불행한 결혼생활 탓으로 돌리기에 준호는 확실히 이기적인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계산이 없는 아이의 투쟁과 같은 성질이었다.
정수가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육중하게 일어섰다.
그러나 준호는 문간에 기대어 말했다.
-형은 나를 조롱해도 좋아요. 뭐라고 말해도 좋아요.
하지만 중요한 건 나는 이런 마음으로부터 헤어 나올 수 없을 거예요.
준호는 통증을 느꼈다.
그것은 실제로 일어나는 물리적인 심장의 통증이었다.
준호는 울고 있는 심장을 빨래 짜듯 비트는 고통에 가슴을 움켜쥐었다.
다음 날은 주말이었고 준호는 집으로 돌아갔다.
연속극을 보며 과일을 깎고 있는 아내를 보다가
준호는 이혼하고 싶다는 말이 하고 싶은 것을 꾹 눌러 참아야 했다.
그것은 아내와의 연애시절, 헤어지자 말하려고 만났다가
프로포즈를 받기 직전처럼 해맑게 웃고 있는 여자의 얼굴에 대고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한 것과 같은 종류의 마음이었다.
준호는 극단적인 것을 요구하는 결단에 있어 비겁했던 자기를 후회하며 회의에 넘쳐 살고 있었다.
준호는 살면서 세 명의 여자에게서 운명 같은 것을 느꼈다.
지인으로부터 아내를 소개받았을 때와 연희를 처음 보았을 때,
(이 여자에게서 평생 벗어나지 못하겠구나)라는 것을 본능처럼 깨달았지만
그 두 번의 각각은 전혀 다른 성질의 구속이었다.
그리고 선생님.
열일곱 살이었던 준호를 사랑한 마흔 살의 한 여자.
레스토랑은 사람들로 붐볐다.
준호는 많은 사람들 중에서 연희를 금방 찾아냈다.
그러나 곧 다가가 말을 걸지 못했다.
그것은 아마 연희가 그렇게도 생각에 깊이 잠긴 쌀쌀한 얼굴을 하고 책을 펼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번은 웬 남자가 말을 걸었으나 연희는 대답조차도 하지 않았다.
누가 문을 열고 들어올 때마다 연희는 잠깐 쳐다보고는 점점 어두운 표정을 띠면서 다시 책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연희가 한참 동안이나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언제나 같은 페이지였다.
준호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연희가 자기를 알아볼 때 까지 가만히 서 있었다.
연희에게 만나자는 연락이 왔을 때 준호는 반갑기 보다 오히려 겁이 났다.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적중률이 높다.
엄숙한 연희의 얼굴이 그것을 확인시켜 주고 있었다.
그 순간에 준호는 연희가 혼란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일찍 나오셨네요? 저는 읽을거리가 있어서 한참 전에 나와 있었어요.
기척을 느낀 연희가 고개를 들고 무뚝뚝하게 말했다.
-오늘은 차를 가지고 왔어요. 드라이브 좋아하세요?
준호가 주눅이 든 표정으로 말했다.
-아직 학생인데 편하게 생활하시네요.
- 제 능력은 아니고, 아이엄마 덕분이지요.
연희는 이렇게 말하는 준호가 조금 뻔뻔스럽게 느껴졌다.
그리곤 다시 이어서 말을 하려는데 준호가 재빠르게 먼저 말했다.
-사랑해요
연희는 미소지었다.
그 미소에는 약간의 조롱과 우월감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무언지 모르게 감동시키는 것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우수에 찬 미소였다.
연희가 아무 대답도 안 하고 대화를 계속할 의향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준호가 그것을 해야만 했다.
-가을학기에 쫑파티를 하는데 같이 가주시겠어요?
연희는 동그랗게 눈을 뜨며 어깨를 추켜 세웠다.
-교수님이나 학생들 보는 앞에서 저와 커플로 쫑파티에 등장하시겠다니. 제정신이세요?
-저는 단지 제가 하고 싶은 일을 말하는 것뿐이에요. 사람들이 어떻게 쳐다보든 상관없어요.
연희는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얘기를 하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연희는 그렇게 말하지 못할 것이라는 걸 직감하고 이마를 습기 있는 차가운 유리창에 대었다.
준호는 순간 연희를 꼭 끌어안고 싶다는 욕망이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났다.
연희는 스스럼없이 하고 싶은 말을 해버리고 마는 철없는 아이와 같은 준호에게서 오히려 비범함을 느꼈다.
-노래 부르러 가실래요? 봄이여 오라 연습 많이 했는데 들어주실래요?
준호가 일부러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연희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렇다고 거절하지도 못했다.
동경에 찬 욕망이 속에서 깨어났다.
준호와 계속 만나는 것으로 무한한 황무지가 자기 앞에 입을 벌리고 있다 할지라도
오랜 세월 연애에 대한 냉담의 지배가
준호와 함께 있는 동안에는 허물어지게 되는 신기한 경험을 뿌리치기가 힘들었다.
그것은 결정적인 호기심 같은 것이었다.
준호와 연희가 싸구려 인테리어의 지하 노래방에서 드디어 단 둘이 있게 됐을 때
흔하게 상상할 수 있는 어떤 일은 일어나고 말았다.
천정에서 어지럽게 뱅뱅 돌아가는 삼원색의 조명 아래서
준호는 한참 동안이나 노래 불렀다.
연희는 그 천진한 모습을 신기한 듯이 쳐다보았다.
준호가 봄이여 오라를 세 번이나 부르고 네 번째로 다시 부르려 할 때
지칠 줄 모르는 준호를 저지하려고 연희가 일어나 스톱버튼을 누르려 하는 순간
준호가 연희를 와락 끌어안았다.
얼마나 세게 끌어안았는지 연희는 가슴이 답답하고 제대로 숨도 쉬어지지 않았다.
아는지 모르는지 준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 곡의 노래 반주가 끝나가도록 연희를 결박에서 풀어주지 않았다.
연희는 자포자기 하고 오른쪽 볼을 준호의 왼쪽 어깨에 기댔다.
준호가 갑자기 연희를 벽 쪽으로 밀어붙이더니 기습적으로 키스를 했다.
연희의 꼭 다물어진 입술이 열리자 준호가 연희의 두 다리 사이로 자기의 오른쪽 다리를 밀어넣었다.
연희의 얼굴은 회를 칠한 담벼락 같이 흰 얼굴빛이 되었다.
연희는 반사적으로 준호를 밀치고 거칠게 소리쳤다.
-저리 비키지 못해요!
연희는 갑자기 모든 게 뻔하고 시시해졌다.
숄더백을 낚아채 서둘러 준호에게서 도망친 연희는 차를 타지 않고 걸었다.
목적지가 집인지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엄격하게, 자극적으로 자기의 잘못에 대해 질책하면서 계속 걸었다.
그러나 곧이어 연희는 자기의 조롱하는 듯한 어조가 준호를 놀라게 할 수 없고
오히려 견고하게 만들고 있는 것을 느끼고 참을 수 없는 혼란에 빠졌다.
연희가 노래방에서 화를 내며 순식간에 모든 것을 끝장내버리려는 듯 행동했을 때도
준호는 동요하지 않고 잠잠히 서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어쩌면 서로의 입장이 교차하는 동안 공정한 바른 태도인지도 몰랐다.
연희는 조금 전 준호가 빼앗았던 입술을 검지로 만지작거렸다.
얼굴이 붉어지는 것 같았다.
질주하는 자동차의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는 도로 속으로
달콤하게 느껴버린 키스의 기억을 내팽개치고 싶었다.
준호는 기숙사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연희의 신비스러운 적의와 끈기 있고 피곤한 자기 주장 사이의 넓은 길을 재어보았다.
준호는 자기의 이기심이 잘못에 잘못을 거듭하고 맨 끝에는 고독만이 남는다고 할지라도
그쳐지지 않을 일이라고 생각했다.
준호는 또 힘을 다해서 주문을 걸었다.
(연희도 언젠가는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날이 올거야. 연희가 떠나지 않고 언제까지나 내 곁에 머문다면...)
준호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연희를 사랑하는 것은 흔들림이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 말에 신뢰를 받을 수 없는 현실적인 자기의 처지가 먹먹했다.
기숙사로 돌아가자 룸메이트 정수가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준호는 정수를 흔들어 깨웠다.
-형, 일어나요. 할 말이 있어요.
-임마, 피곤해. 내일 이야기 하자.
정수가 갑자기 켜진 형광등 불빛에 눈살을 찌푸리며 시계를 보고 짜증스럽게 말했지만
침울한 준호의 얼굴을 보더니 심각성을 알아차리고 잠이 확 깨버린다는 듯 일어났다.
-무슨 일인데 곧 죽게 생긴 사람처럼 이래?
준호는 냉장고에 먹다가 반쯤 남겨둔 소주를 물컵에 모두 따라 꿀꺽꿀꺽 들이켰다.
-형, 나 만나는 여자 있어요.
-임마 니가 만나는 여자가 어디 한 둘이었어? 새삼스럽게 왜 이러냐.
정수가 김샌다는 말투로 말했다.
-그 여자를 사랑해요. 그런데 그 여자가 내 마음을 너무 몰라줘요.
-어쭈 이 자식 쑈하고 있네.
정수는 준호 같은 사람의 넋을 단숨에 빼놓은 여자는 필시 여우일 것이라 판단하고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야 임마, 그거 석 달 정도 지나면 다 시들해져. 남녀상열지사라는 게 다 거기서 거기야.
준호는 연희 이전에 여러 종류의 여자들과 연이 닿으면
아무렇게나 연애하고 쉽게 헤어지는 바람둥이였기 때문에
정수의 이런 태도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것을 불행한 결혼생활 탓으로 돌리기에 준호는 확실히 이기적인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계산이 없는 아이의 투쟁과 같은 성질이었다.
정수가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육중하게 일어섰다.
그러나 준호는 문간에 기대어 말했다.
-형은 나를 조롱해도 좋아요. 뭐라고 말해도 좋아요.
하지만 중요한 건 나는 이런 마음으로부터 헤어 나올 수 없을 거예요.
준호는 통증을 느꼈다.
그것은 실제로 일어나는 물리적인 심장의 통증이었다.
준호는 울고 있는 심장을 빨래 짜듯 비트는 고통에 가슴을 움켜쥐었다.
다음 날은 주말이었고 준호는 집으로 돌아갔다.
연속극을 보며 과일을 깎고 있는 아내를 보다가
준호는 이혼하고 싶다는 말이 하고 싶은 것을 꾹 눌러 참아야 했다.
그것은 아내와의 연애시절, 헤어지자 말하려고 만났다가
프로포즈를 받기 직전처럼 해맑게 웃고 있는 여자의 얼굴에 대고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한 것과 같은 종류의 마음이었다.
준호는 극단적인 것을 요구하는 결단에 있어 비겁했던 자기를 후회하며 회의에 넘쳐 살고 있었다.
준호는 살면서 세 명의 여자에게서 운명 같은 것을 느꼈다.
지인으로부터 아내를 소개받았을 때와 연희를 처음 보았을 때,
(이 여자에게서 평생 벗어나지 못하겠구나)라는 것을 본능처럼 깨달았지만
그 두 번의 각각은 전혀 다른 성질의 구속이었다.
그리고 선생님.
열일곱 살이었던 준호를 사랑한 마흔 살의 한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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