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호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졌다.
연희는 그 모습을 컬러에서 흑백으로 바뀌는 화면처럼 바라보았다.
빗줄기는 더 이상 굵어지지 않았지만 낮고 음울하게 세상의 모든 색깔을 잠식했다.
모든 것이 무채색이었다.
생기를 거둬들인 하늘이 연희를 물들이고 마침내 준호에게 까지 닿은 것처럼.
언어는 침묵으로 돌아갔다.
연희는 빗소리를 끈질기고 근엄한 판결문으로 들으며
명징하려면 견딜 것이라 다짐했다.
그러나 그것은 이성이 명하는 재촉일 뿐
준호의 낯빛이 절망이 아닌 체념으로 바뀌어가는 모습에 낙담했다.
준호의 행동은 예상 외로 침착했다.
그것은 참을 만한 고통을 감수하는 공포에 동요되지 않는 사람의 절제처럼 보여서
연희의 마음을 무척이나 아프게 했다.
시간은 더디 흐르기도 하고 빨리 흐르기도 했지만
어느 쪽이라고 해도 상대적 괴로움을 뜻했다.
연희는 아침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준호의 강권에 의해 식탁 앞에 앉혀졌다.
연희는 모래를 씹으며 울지 않으려고 하는 것에 모든 체력을 쏟아 부었다.
연희가 절반도 먹지 못하고 숟가락을 놓자 준호가 근심스럽게 말했다.
-다 먹어요. 먼 길 가려면 든든해야죠.
-더 이상 못 먹겠어요. 그리고 나 버스 타고 갈래요.
-괜찮겠어요?
-네. 그러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터미널 까지 바래다 주는 건 괜찮죠?
연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은 왜 투정부리지 않는 것일까)
연희는 무너지려 하고 있었다.
-부탁이 있어요.
준호가 다정하게 말했다.
-뭔데요?
-나랑 헤어지더라도 그 목걸이는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해줘요.
연희는 하트모양의 링 안에 연희의 이니셜이 새겨진 백금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크리스마스에 준호에게 받은 선물이었다.
-그럴게요.
연희는 이렇게 말했지만 약속은 지켜질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자 이제 일어나요. 바래다 줄게요.
(이 사람은 나만큼 슬프지 않은 것일까)
준호는 어떤 일이 있어도 침착을 잃지 않는 사람의 표본처럼 순서대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연희는 그 모습이 기계적으로 까지 느껴져서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가장 빠른 서울행 티켓 한 장 주세요.
-20분 후에 출발합니다. 요금은 18,100원입니다. 서명해주세요.
비는 그치지 않고 계속 내리고 있었다.
1월의 차가운 공기가 뼈 속 까지 파고들었다.
연희는 떨기 시작했다.
추위 때문만은 아니었다.
준호가 웃옷을 벗어 연희에게 걸쳐주며 뒤에서 가만히 안았다.
연희는 점점 더 심하게 떨었다.
준호는 연희를 더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왼 볼을 연희의 오른쪽 귓불에 대고 말했다.
-자, 내가 시키는 대로 해봐요. 3초 정도 숨을 크게 천천히 들이 마셔요.
그리고 잠시 멈췄다가 또 천천히 내뱉는 거에요. 이 동작을 열 번만 반복해요.
그럼 괜찮아 질거에요.
준호는 이해되지 않을 만큼 평온했다.
연희는 준호가 반항하며 헤어질 수 없다고 자기를 설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준호였다.
그러나 준호는 그렇게 하지 않고 있었다.
연희는 몰래 이별을 결심하며
헤어지는 순간 자기가 실천해야 할 냉담의 연습이 필요 없어진 것에 대해
절망하고 또 절망했다.
버스가 도착하고 손님을 싣기 위해 출입구를 열었다.
연희는 준호를 돌아다보고 싶었지만 곧바로 걸어가 버스에 올랐다.
연희는 후회로 얼룩진 자기의 얼굴을 준호가 보는 게 싫었다.
연희는 9번 자리에 앉아 비로소 준호를 바라보았다.
유리창에 묻은 물방울은 우산을 들고 서 있는 준호의 모습과 로맨틱하게 섞여있었다.
버스는 출발했고 준호의 모습은 멀어졌다.
연희는 준호의 번호를 이제는 핸드폰에서 삭제해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연희는 핸드폰을 꺼냈다.
010-9XXX-XXXX
이 번호를 언제쯤 잊을 수 있게 될까.
연희는 메시지함을 열어보았다.
-목요일 칼국수 해 줄거죠?^o^
나 욕심쟁이죠?
이쁜 얼굴만 봐도 감지덕지일 텐데.
많이 보고싶어요.
-어제 연희씨와 닮은 소녀를 봤어요.
초등학생으로 보이는데
긴 다리와 팔.
동그란 작은 얼굴과 까만 눈동자도 연희씨를 연상하게 했어요.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어릴 때 연희씨도 저런 모습이지 않았을까 생각했어요.
-연희씨 없는 세상에 사는 건 참 싫어요.
운동은 열심히 했는데
도서관엔 못 갔어요. 아니 가기 싫었어요.
벌 받아야겠죠?
수업 잘 마치고 기분 좋게 이 문자를 봤음 좋겠어요.
내 사랑의 섹시함이 종일 몸을 감싸고 있는 것 같아요.
많이 사랑해요.
-오늘 함께 본 영화는 싫었어요.
이후 연희씨와 사랑을 나누고 싶었는데
사랑을 나누면서도 영화생각이 날 것 같았고..
투정부려서 미안해요.
미안해요 소리 말곤 제대로 하는 것도 없네요.
보고 싶어요.
죽을 만큼.
-요즘 학교에서 난 아웃사이드에요
내겐 연희씨 밖에 없는걸요.
본가에 가면 내일은 못 보겠네요.
하루 종일 수업하고 가느라 무척 피곤했을텐데
컨디션조절 잘하고 빨리 볼 수 있었음 좋겠어요
어서 연희씨를 만날 시간이 왔음 좋겠어요
시간이 더디 갈 것 같아요.
-내 총기가 고갈되어 연희씨와 보낸 순간순간을 다 기억하지 못하는 게
안타깝지만 지금 연희씨의 초콜릿 무스 듬뿍한 아이스크림 같은
문자를 받는 사람이 나 하나임을 감사하고 자랑스러워요.
함께 함을 감사하고 먼 미래까지 연희씨와 함께 할거라는 희망이
내 머리 나빠짐을 다 갈음 해요.
-운동 가요.
모처럼 여유로운 시간을 가지고
내 근육 한 올 한 올을 짜 볼거에요.
운동 마치자 마자 터질듯(약간 과장해서^ㅇ^)한
몸을 보여주고 싶어요.. ㅎ
-세미나 간다구요?
미리 얘기하죠.
더 슬퍼요.
잘 다녀와요.
-보고싶어요.
방금 보고 왔는데 말이에요.
눈치채지 못한 내가 미워요.
터미널에 도착했어요?
오늘 느끼는 이 감정도
그동안 먼지쌓인 애틋함이겠지요?
연희씨가 날 아끼는 거 무척 아끼는걸 알아요.
오늘 같은 날이 매일인 것도 아니잖아요.
귀신 나올 것 같은 터미널에 연희씨 혼자 있는 게 싫어요.
버스 떠날 때까지 뒤에서 꼭 안아주고 있어야 하는데..
다음엔 그러지마요.
제발 부탁이에요.
약속해줘요.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말처럼 이번 주는 참 좋아요.
오후 해가 종일 에어컨 바람에 오그라들었던 피부를
녹여주는 따사로운 느낌.
내 가슴은 연희씨 문자로 인해 뽀송뽀송한 느낌.
시험 끝나면 같이 여행 가요.
내 왕 자존심쟁이 여자친구님..^o^
연희는 무너져내렸다.
갇혀 있던 눈물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렸다.
연희는 흐느껴 울었다.
(나는 옳은 일을 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참기 힘들 정도로 슬프다.
나는 현실의 사랑을 관념의 열병으로 끌어안으려 했던 나를 더 이상 허용할 수가 없었다.
나는 도덕가가 아니며 또한 그렇게 되고 싶지도 않지만
내가 사랑이라 깨달은 것에 다시는 복지를 마련해 주어서는 안 되겠지.
그러나 뼈마디가 끊겨나가는 것 같은 이 현실의 체험으로 알겠다.
이별을 계획하며 내가 각오했던 서러운 눈물의 낮밤이
얼마나 어설픈 심정의 체험에 불과했는지를...)
연희는 죽어버린 후에 이승의 땅을 밟았던 그 발걸음으로 저승의 대륙을 가는 사람처럼,
반쯤 잠자는 사람과도 같이 반쯤은 이상한 악몽을 꾸는 듯이 차창에 기댄 팔에 얼굴을 묻었다.
집에 도착한 연희는 곧바로 침대 위에 쓰러졌다.
연희는 옷도 벗지 못한 채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 달팽이처럼 웅크렸다.
그리고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닷새가 지났다.
연희의 삶은 멈췄다.
연희는 거의 먹지 않았다. 수업은 모두 중단되었다.
연희는 울다 지쳐 잠이 들고 잠에서 깨어나면 또 울었다.
두껍게 쳐진 겨울커튼이 시간을 삼켜버렸다.
(지금은 낮일까 밤일까. 나는 옛날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
(보고 싶다. 목소리를 듣고 싶다. 나는 그 사람을 정말로 사랑하는구나.
무섭다. 끝나고 나서도 불붙는 이 심혼이 무섭다)
연희는 모든 연락을 차단하고 있었다.
민숙에게서 문자 네 통과 전화 두 번, 지훈에게서 전화 두 번,
그 외 몇 사람에게 문자나 전화가 왔지만 전화를 받지도 답장을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핸드폰을 꺼놓을 수는 없었다.
준호는 전화 보다는 문자로 소통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익숙한 문자음이 들릴 때 마다 연희는 잠재적 습관처럼 깜짝깜짝 놀랐다.
그러나 준호는 아니었다.
준호일 리가 없었다.
연희는 문자음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연희는 결연해 보였던 준호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며 다시 울었다.
(그 사람은 정말 약속을 지키려 하는구나)
다시 한 번 문자음이 울렸다.
(이 소리는 이제 너무 괴롭다)
연희는 힘 없이 손을 뻗어 핸드폰을 확인했다.
준호였다.
-오늘 저녁 몇 시쯤 어디로 데릴러 갈까요?
(세상에 이 사람은 뭘까)
준호가 전달한 활자 속에는 어제 했던 일을 오늘 또 하는 사람의 자연스러움처럼
스스럼 없는 습관의 맛이 베어있었다.
연희는 그 모습을 컬러에서 흑백으로 바뀌는 화면처럼 바라보았다.
빗줄기는 더 이상 굵어지지 않았지만 낮고 음울하게 세상의 모든 색깔을 잠식했다.
모든 것이 무채색이었다.
생기를 거둬들인 하늘이 연희를 물들이고 마침내 준호에게 까지 닿은 것처럼.
언어는 침묵으로 돌아갔다.
연희는 빗소리를 끈질기고 근엄한 판결문으로 들으며
명징하려면 견딜 것이라 다짐했다.
그러나 그것은 이성이 명하는 재촉일 뿐
준호의 낯빛이 절망이 아닌 체념으로 바뀌어가는 모습에 낙담했다.
준호의 행동은 예상 외로 침착했다.
그것은 참을 만한 고통을 감수하는 공포에 동요되지 않는 사람의 절제처럼 보여서
연희의 마음을 무척이나 아프게 했다.
시간은 더디 흐르기도 하고 빨리 흐르기도 했지만
어느 쪽이라고 해도 상대적 괴로움을 뜻했다.
연희는 아침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준호의 강권에 의해 식탁 앞에 앉혀졌다.
연희는 모래를 씹으며 울지 않으려고 하는 것에 모든 체력을 쏟아 부었다.
연희가 절반도 먹지 못하고 숟가락을 놓자 준호가 근심스럽게 말했다.
-다 먹어요. 먼 길 가려면 든든해야죠.
-더 이상 못 먹겠어요. 그리고 나 버스 타고 갈래요.
-괜찮겠어요?
-네. 그러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터미널 까지 바래다 주는 건 괜찮죠?
연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은 왜 투정부리지 않는 것일까)
연희는 무너지려 하고 있었다.
-부탁이 있어요.
준호가 다정하게 말했다.
-뭔데요?
-나랑 헤어지더라도 그 목걸이는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해줘요.
연희는 하트모양의 링 안에 연희의 이니셜이 새겨진 백금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크리스마스에 준호에게 받은 선물이었다.
-그럴게요.
연희는 이렇게 말했지만 약속은 지켜질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자 이제 일어나요. 바래다 줄게요.
(이 사람은 나만큼 슬프지 않은 것일까)
준호는 어떤 일이 있어도 침착을 잃지 않는 사람의 표본처럼 순서대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연희는 그 모습이 기계적으로 까지 느껴져서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가장 빠른 서울행 티켓 한 장 주세요.
-20분 후에 출발합니다. 요금은 18,100원입니다. 서명해주세요.
비는 그치지 않고 계속 내리고 있었다.
1월의 차가운 공기가 뼈 속 까지 파고들었다.
연희는 떨기 시작했다.
추위 때문만은 아니었다.
준호가 웃옷을 벗어 연희에게 걸쳐주며 뒤에서 가만히 안았다.
연희는 점점 더 심하게 떨었다.
준호는 연희를 더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왼 볼을 연희의 오른쪽 귓불에 대고 말했다.
-자, 내가 시키는 대로 해봐요. 3초 정도 숨을 크게 천천히 들이 마셔요.
그리고 잠시 멈췄다가 또 천천히 내뱉는 거에요. 이 동작을 열 번만 반복해요.
그럼 괜찮아 질거에요.
준호는 이해되지 않을 만큼 평온했다.
연희는 준호가 반항하며 헤어질 수 없다고 자기를 설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준호였다.
그러나 준호는 그렇게 하지 않고 있었다.
연희는 몰래 이별을 결심하며
헤어지는 순간 자기가 실천해야 할 냉담의 연습이 필요 없어진 것에 대해
절망하고 또 절망했다.
버스가 도착하고 손님을 싣기 위해 출입구를 열었다.
연희는 준호를 돌아다보고 싶었지만 곧바로 걸어가 버스에 올랐다.
연희는 후회로 얼룩진 자기의 얼굴을 준호가 보는 게 싫었다.
연희는 9번 자리에 앉아 비로소 준호를 바라보았다.
유리창에 묻은 물방울은 우산을 들고 서 있는 준호의 모습과 로맨틱하게 섞여있었다.
버스는 출발했고 준호의 모습은 멀어졌다.
연희는 준호의 번호를 이제는 핸드폰에서 삭제해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연희는 핸드폰을 꺼냈다.
010-9XXX-XXXX
이 번호를 언제쯤 잊을 수 있게 될까.
연희는 메시지함을 열어보았다.
-목요일 칼국수 해 줄거죠?^o^
나 욕심쟁이죠?
이쁜 얼굴만 봐도 감지덕지일 텐데.
많이 보고싶어요.
-어제 연희씨와 닮은 소녀를 봤어요.
초등학생으로 보이는데
긴 다리와 팔.
동그란 작은 얼굴과 까만 눈동자도 연희씨를 연상하게 했어요.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어릴 때 연희씨도 저런 모습이지 않았을까 생각했어요.
-연희씨 없는 세상에 사는 건 참 싫어요.
운동은 열심히 했는데
도서관엔 못 갔어요. 아니 가기 싫었어요.
벌 받아야겠죠?
수업 잘 마치고 기분 좋게 이 문자를 봤음 좋겠어요.
내 사랑의 섹시함이 종일 몸을 감싸고 있는 것 같아요.
많이 사랑해요.
-오늘 함께 본 영화는 싫었어요.
이후 연희씨와 사랑을 나누고 싶었는데
사랑을 나누면서도 영화생각이 날 것 같았고..
투정부려서 미안해요.
미안해요 소리 말곤 제대로 하는 것도 없네요.
보고 싶어요.
죽을 만큼.
-요즘 학교에서 난 아웃사이드에요
내겐 연희씨 밖에 없는걸요.
본가에 가면 내일은 못 보겠네요.
하루 종일 수업하고 가느라 무척 피곤했을텐데
컨디션조절 잘하고 빨리 볼 수 있었음 좋겠어요
어서 연희씨를 만날 시간이 왔음 좋겠어요
시간이 더디 갈 것 같아요.
-내 총기가 고갈되어 연희씨와 보낸 순간순간을 다 기억하지 못하는 게
안타깝지만 지금 연희씨의 초콜릿 무스 듬뿍한 아이스크림 같은
문자를 받는 사람이 나 하나임을 감사하고 자랑스러워요.
함께 함을 감사하고 먼 미래까지 연희씨와 함께 할거라는 희망이
내 머리 나빠짐을 다 갈음 해요.
-운동 가요.
모처럼 여유로운 시간을 가지고
내 근육 한 올 한 올을 짜 볼거에요.
운동 마치자 마자 터질듯(약간 과장해서^ㅇ^)한
몸을 보여주고 싶어요.. ㅎ
-세미나 간다구요?
미리 얘기하죠.
더 슬퍼요.
잘 다녀와요.
-보고싶어요.
방금 보고 왔는데 말이에요.
눈치채지 못한 내가 미워요.
터미널에 도착했어요?
오늘 느끼는 이 감정도
그동안 먼지쌓인 애틋함이겠지요?
연희씨가 날 아끼는 거 무척 아끼는걸 알아요.
오늘 같은 날이 매일인 것도 아니잖아요.
귀신 나올 것 같은 터미널에 연희씨 혼자 있는 게 싫어요.
버스 떠날 때까지 뒤에서 꼭 안아주고 있어야 하는데..
다음엔 그러지마요.
제발 부탁이에요.
약속해줘요.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말처럼 이번 주는 참 좋아요.
오후 해가 종일 에어컨 바람에 오그라들었던 피부를
녹여주는 따사로운 느낌.
내 가슴은 연희씨 문자로 인해 뽀송뽀송한 느낌.
시험 끝나면 같이 여행 가요.
내 왕 자존심쟁이 여자친구님..^o^
연희는 무너져내렸다.
갇혀 있던 눈물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렸다.
연희는 흐느껴 울었다.
(나는 옳은 일을 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참기 힘들 정도로 슬프다.
나는 현실의 사랑을 관념의 열병으로 끌어안으려 했던 나를 더 이상 허용할 수가 없었다.
나는 도덕가가 아니며 또한 그렇게 되고 싶지도 않지만
내가 사랑이라 깨달은 것에 다시는 복지를 마련해 주어서는 안 되겠지.
그러나 뼈마디가 끊겨나가는 것 같은 이 현실의 체험으로 알겠다.
이별을 계획하며 내가 각오했던 서러운 눈물의 낮밤이
얼마나 어설픈 심정의 체험에 불과했는지를...)
연희는 죽어버린 후에 이승의 땅을 밟았던 그 발걸음으로 저승의 대륙을 가는 사람처럼,
반쯤 잠자는 사람과도 같이 반쯤은 이상한 악몽을 꾸는 듯이 차창에 기댄 팔에 얼굴을 묻었다.
집에 도착한 연희는 곧바로 침대 위에 쓰러졌다.
연희는 옷도 벗지 못한 채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 달팽이처럼 웅크렸다.
그리고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닷새가 지났다.
연희의 삶은 멈췄다.
연희는 거의 먹지 않았다. 수업은 모두 중단되었다.
연희는 울다 지쳐 잠이 들고 잠에서 깨어나면 또 울었다.
두껍게 쳐진 겨울커튼이 시간을 삼켜버렸다.
(지금은 낮일까 밤일까. 나는 옛날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
(보고 싶다. 목소리를 듣고 싶다. 나는 그 사람을 정말로 사랑하는구나.
무섭다. 끝나고 나서도 불붙는 이 심혼이 무섭다)
연희는 모든 연락을 차단하고 있었다.
민숙에게서 문자 네 통과 전화 두 번, 지훈에게서 전화 두 번,
그 외 몇 사람에게 문자나 전화가 왔지만 전화를 받지도 답장을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핸드폰을 꺼놓을 수는 없었다.
준호는 전화 보다는 문자로 소통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익숙한 문자음이 들릴 때 마다 연희는 잠재적 습관처럼 깜짝깜짝 놀랐다.
그러나 준호는 아니었다.
준호일 리가 없었다.
연희는 문자음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연희는 결연해 보였던 준호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며 다시 울었다.
(그 사람은 정말 약속을 지키려 하는구나)
다시 한 번 문자음이 울렸다.
(이 소리는 이제 너무 괴롭다)
연희는 힘 없이 손을 뻗어 핸드폰을 확인했다.
준호였다.
-오늘 저녁 몇 시쯤 어디로 데릴러 갈까요?
(세상에 이 사람은 뭘까)
준호가 전달한 활자 속에는 어제 했던 일을 오늘 또 하는 사람의 자연스러움처럼
스스럼 없는 습관의 맛이 베어있었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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