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희와 준호는 소박한 저녁을 먹고 영화를 보고
연희의 집 앞 공원 까지 함께 걸었다.
어둠이 깊게 깃들고 있었다.
두 사람은 공원을 이리저리 거닐었다.
우수와 관능에 마비되어 있는 것 같은 밤이었다.
준호는 연희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때 마다 연희는 무심하게 반응 했다.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아요? 사랑에 관해서 조금이라도 알고 있어요?
연희의 질문은 준호를 당황케 했다.
-알아요
라고 말했지만 준호는 거북한 것을 느꼈다.
-나는 절대적으로 연희씨와 모든 결과에 함께 속하고 싶어요.
-그럼 사랑과 정열의 차이는 무엇이에요?
라고 물으면서 연희는 준호를 의심하듯 쳐다보았다.
준호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었다.
-정열은 지나가 버리지만 사랑은 영속적이에요.
그러나 연희의 눈을 보니 자기의 대답이 몹시 진부하게 생각되었다.
그래서 준호는 다만
-그건 아무도 정확하게는 모른다고 생각해요.
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연희는 얼굴을 천천히 준호한테서 돌려 허공을 향하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바로 그것이에요. 아무도 이 일에 관해서는 알지 못해요.
준호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 했다.
준호는 연희가 다음 말을 이을 때까지 숨을 죽이고 있었다.
-나는 일생 동안 한 번도 정말로 사랑하지 않았어요. 한 번도 진짜가 아니었어요.
나는 한 번도 한 남자 때문에 정말로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았어요.
나는 사랑한다는 게 무엇인지를 몰랐어요.
두 사람은 벤치에 앉았다.
준호는 잠자코 연희를 바라보았다.
연희는 마치 달빛에 이끌린 밤의 작은 동물 같아 보였다.
연희의 심장 고동이나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가늘게 실룩거리며 떨리고 있는 그림자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마치 어둠을 향해 소리 없이 말을 걸고 있는 것처럼...
이렇게 사랑스러운 연희를 앞에 두고 준호는
자기의 죄란 연희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결단을 회피하고 아내와 결혼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준호는 그것이 비겁에서 나온 것인가를 스스로 물어보았다.
(그렇지 않다.
그것은 아마 약함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끊임없는 찬성과 불찬성의 비교 속에서 결단을 빼앗기고
포기와 우울 속에 생을 던져버린 내가
연희에게 결단을 강요할 수 있는 것일까.
죽음을 맞대고서도 나는 이에 대한 대답을 모른다)
결혼식이 있던 날 아침 준호는 친구 성범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 이 결혼 물러라
그처럼 인습적이고 자포자기한 모습을 준호에게서 보아버린 성범은 친구를 구제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준호는 식장으로 걸어 들어갔고 한 여자의 남편이 되었다.
준호는 이렇게 뒤늦게 연희를 알아버렸다는 사실에 자기 비애의 잔재를 느꼈다.
연희는 시계를 들여다 보며 말했다.
-열 두시가 넘었어요. 이제 가야해요.
준호의 얼굴은 어둡게 굳어졌다.
그것은 먹던 아이스크림을 떨어뜨린 영락없는 아이의 모습이었다.
-같이 있고 싶어요. 헤어지기 싫어요.
-안 돼요
-사랑해요. 연희씨도 저를 좋아하나요?
연희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소녀의 맹목적인 고집처럼 속으로 말했다.
(이 남자를 갖고 싶다. 내가 어찌된 셈일까? 내가 어떤 수준에 내려간 것일까?
원시에의 이 얼마나 기막힌 추락인 걸까?
내가 그처럼 확고하다고 믿은 나의 정신성은 그럼 생의 기만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던가?
나는 준호를 사랑하는 걸까? 나는 준호의 전화를 기다린다.
그러면서 나는 안다. 온갖 예리한 힘을 가지고 안다.
내가 나의 법칙을 넘어가고 있다는 것을.
왜 나는 이 사람과 아름다운 우정으로만 만족할 수 없는 것일까?
우정이라면 우리에게 성립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 없다.
벌써 나는 나 자신을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
왜 나는 도대체 이 모든 미숙한 행동들을 하고 있는 것일까.
수치스럽다고 생각한다.)
연희는 고개를 저었다.
연희가 준호로부터
그리고 자기를 붙잡고 흔드는 생각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준호가 연희를 쳐다보지 않으며 말했다.
-연희씨는 사랑받는데 서툰 사람이로군요.
준호의 이 말은 마치 문을 세게 닫는 쾅 소리와도 같이
오랫동안 잠재해 있던 연희의 옛 고통을 일깨웠다.
연희는 고개를 돌렸으나 준호는 연희의 얼굴이 충격에 휩싸인 것을 보았고
자기가 연희에게 준 타격은 자기 자신에게도 들어맞는 무엇이라는 것을 알았다.
집으로 돌아 온 연희는 늦도록 자지 못했다.
(연희씨는 사랑받는데 서툰 사람이로군요)
이것은 습격당한 진실이었고 비로소 명백해지는 탄원이었고 살을 지지는 눈물이었다.
연희는 침묵 중에 가장 적막한 침묵에 쌓여 온갖 몸서리 가운데 내면으로 전율했다.
그러면서 제일로 놀랍고 안정된 해답을 찾게 되는 것 같았다.
연희는 먹물 같은 어둠 속에 한참이나 웅크리고 앉아 기도하고 희구했다.
연희의 가슴이 햇솜마냥 부풀어 올랐다.
연희는 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랑해요
연희의 이 고백은 열망의 곤혹이었으나 불요불굴이었다.
아침이 되었을 때 연희는 조용하고 안정된 손이 생애에 질서를 가져다 주는 것을 느끼며 눈을 떴다.
연희는 수업과제를 검토하기 위해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폈다.
준호에게서 메일이 와 있었다.
연희는 정돈된 소녀와 같은 마음으로 준호의 메일을 열었다.
童貞
난 옹졸하고 함부로 말하는게 얼마나 많았는지...
당신과 대화하거나 당신의 행동을 볼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라고 부끄러움을 티내지 않으려 참 많이 애쓴 적이 여러번 이었습니다.
당신과 가까워 질수 록 당신의 깊음에 놀라고 스스로 초라함이 커져갑니다.
당신을 알지 못할 때 함부로 뱉은 말이 항상 날 구속했었습니다.
연락하지 말라면 이유도 물어보지 않겠노라고..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순간에서도 당신이 정색을 하고 말을 머뭇거리면
혹시 헤어지자는 얘기일까
긴장이 되어 목이 뻣뻣하고 피가 역류하는 느낌이었습니다.
내가 했던 말이 항상 날 짓눌렀기 때문에 긴장하고 두려워 할 수 밖에 없었나 봅니다.
어젯밤 갑자기 맘이 동요했던 것이 아니라
이전부터 날 종용하고 다급하게 만드는 기운이 급작스레
나 너 좋아해 라는 말을 듣고 싶다는 욕망을 간절하게 했나봅니다.
그냥 그 말이 너무 듣고 싶었습니다.
내 모든 투정은 그 말을 듣고 싶다는 것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요.
선생님으로 시작해서 정을 준 사람은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습니다.
내가 성인이 되고서 사랑해 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면 잘 믿기지 않겠죠?
아니 자주 듣기도 했지만 오늘 같은 적은 없었네요.
책상 앞에 비스듬히 앉아서 살짝 고인 눈물을 훔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내 모습을 추스리고 밖에 나가 담배를 피우며 하늘을 보고 산을 보는데
내 모든 피가 밑으로 밑으로 내려가는 느낌이었습니다.
머리는 텅 비어버리고 발바닥만 감각이 있는 듯.
삼각형이 되어버린 듯.
많이 아프면 극약을 쓰게 되죠.
독약을 잘 쓰는 사람이 명의라고 합니다.
다시 책상에 앉으니 독약을 마신 사람처럼 쓰러지더군요.
견디기 힘들었어요.
마냥 행복하고 기쁨에 춤춰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며 잠들었어요.
시간이 지나고 깨어 책상에 앉으니
부유하면서 날 괴롭히던 먼지들이 가만히 가라앉았습니다.
스스로 힘들게 하던 몹쓸 상상들의 작은 조각들이
아래로 아래로 가라 앉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당신으로부터 사랑이라는 묘목을 받았구나 했습니다.
당신은 쉽사리 꺽기지 않을 큰 묘목을 주고 싶어하지 않았을까 했는데
내 조급함이 일찍 내게 넘기도록 했나봅니다.
지금 당신을 보러 갈 수 없는 현실이 있고,
우리 사이가 세상에 알려져 비굴한 내 모습을 보이게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내가 받은 이 나무를 잘 가꾸고 키우고 싶습니다.
이제 또 다른 시작의 선에 서 있습니다.
당신이 항상 말하듯 나무는 많은 상처를 받고 또 이겨내며 성장할테죠.
바람에 흔들려 꺾이고 혹은 전기톱에 넘어져 불쏘시개가 되거나 펄프로 변해버릴지라도
당신을 사랑했음을 기뻐하며 마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싶습니다.
안타까운 건 그 말을 들었을 때 내 표정이 어땠는지 당신이 볼 수 없었다는 게..
단 한번 뿐일 표정이었을텐데
당신이 말하는 그 순간 당신 눈빛은 어땠는지 내가 볼 수 없었다는 게..
그 찰나를 같이 할 수 없었다는 게 안타깝습니다.
메일을 쓰려고 맘먹었을 때 잘 쓰려고 하지 않았고
쓴 글은 다시 읽고 수정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하고 시작했습니다.
오타를 수정하고 맞춤법을 수정하고 내용을 다듬으면 보낼 수 없을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내가 뭐라 썼는지 내가 하고픈 말을 정확히 전달했는지
만나면 아끼지 말고 다시 한번 말해주길..
연희의 집 앞 공원 까지 함께 걸었다.
어둠이 깊게 깃들고 있었다.
두 사람은 공원을 이리저리 거닐었다.
우수와 관능에 마비되어 있는 것 같은 밤이었다.
준호는 연희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때 마다 연희는 무심하게 반응 했다.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아요? 사랑에 관해서 조금이라도 알고 있어요?
연희의 질문은 준호를 당황케 했다.
-알아요
라고 말했지만 준호는 거북한 것을 느꼈다.
-나는 절대적으로 연희씨와 모든 결과에 함께 속하고 싶어요.
-그럼 사랑과 정열의 차이는 무엇이에요?
라고 물으면서 연희는 준호를 의심하듯 쳐다보았다.
준호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었다.
-정열은 지나가 버리지만 사랑은 영속적이에요.
그러나 연희의 눈을 보니 자기의 대답이 몹시 진부하게 생각되었다.
그래서 준호는 다만
-그건 아무도 정확하게는 모른다고 생각해요.
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연희는 얼굴을 천천히 준호한테서 돌려 허공을 향하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바로 그것이에요. 아무도 이 일에 관해서는 알지 못해요.
준호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 했다.
준호는 연희가 다음 말을 이을 때까지 숨을 죽이고 있었다.
-나는 일생 동안 한 번도 정말로 사랑하지 않았어요. 한 번도 진짜가 아니었어요.
나는 한 번도 한 남자 때문에 정말로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았어요.
나는 사랑한다는 게 무엇인지를 몰랐어요.
두 사람은 벤치에 앉았다.
준호는 잠자코 연희를 바라보았다.
연희는 마치 달빛에 이끌린 밤의 작은 동물 같아 보였다.
연희의 심장 고동이나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가늘게 실룩거리며 떨리고 있는 그림자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마치 어둠을 향해 소리 없이 말을 걸고 있는 것처럼...
이렇게 사랑스러운 연희를 앞에 두고 준호는
자기의 죄란 연희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결단을 회피하고 아내와 결혼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준호는 그것이 비겁에서 나온 것인가를 스스로 물어보았다.
(그렇지 않다.
그것은 아마 약함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끊임없는 찬성과 불찬성의 비교 속에서 결단을 빼앗기고
포기와 우울 속에 생을 던져버린 내가
연희에게 결단을 강요할 수 있는 것일까.
죽음을 맞대고서도 나는 이에 대한 대답을 모른다)
결혼식이 있던 날 아침 준호는 친구 성범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 이 결혼 물러라
그처럼 인습적이고 자포자기한 모습을 준호에게서 보아버린 성범은 친구를 구제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준호는 식장으로 걸어 들어갔고 한 여자의 남편이 되었다.
준호는 이렇게 뒤늦게 연희를 알아버렸다는 사실에 자기 비애의 잔재를 느꼈다.
연희는 시계를 들여다 보며 말했다.
-열 두시가 넘었어요. 이제 가야해요.
준호의 얼굴은 어둡게 굳어졌다.
그것은 먹던 아이스크림을 떨어뜨린 영락없는 아이의 모습이었다.
-같이 있고 싶어요. 헤어지기 싫어요.
-안 돼요
-사랑해요. 연희씨도 저를 좋아하나요?
연희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소녀의 맹목적인 고집처럼 속으로 말했다.
(이 남자를 갖고 싶다. 내가 어찌된 셈일까? 내가 어떤 수준에 내려간 것일까?
원시에의 이 얼마나 기막힌 추락인 걸까?
내가 그처럼 확고하다고 믿은 나의 정신성은 그럼 생의 기만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던가?
나는 준호를 사랑하는 걸까? 나는 준호의 전화를 기다린다.
그러면서 나는 안다. 온갖 예리한 힘을 가지고 안다.
내가 나의 법칙을 넘어가고 있다는 것을.
왜 나는 이 사람과 아름다운 우정으로만 만족할 수 없는 것일까?
우정이라면 우리에게 성립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 없다.
벌써 나는 나 자신을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
왜 나는 도대체 이 모든 미숙한 행동들을 하고 있는 것일까.
수치스럽다고 생각한다.)
연희는 고개를 저었다.
연희가 준호로부터
그리고 자기를 붙잡고 흔드는 생각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준호가 연희를 쳐다보지 않으며 말했다.
-연희씨는 사랑받는데 서툰 사람이로군요.
준호의 이 말은 마치 문을 세게 닫는 쾅 소리와도 같이
오랫동안 잠재해 있던 연희의 옛 고통을 일깨웠다.
연희는 고개를 돌렸으나 준호는 연희의 얼굴이 충격에 휩싸인 것을 보았고
자기가 연희에게 준 타격은 자기 자신에게도 들어맞는 무엇이라는 것을 알았다.
집으로 돌아 온 연희는 늦도록 자지 못했다.
(연희씨는 사랑받는데 서툰 사람이로군요)
이것은 습격당한 진실이었고 비로소 명백해지는 탄원이었고 살을 지지는 눈물이었다.
연희는 침묵 중에 가장 적막한 침묵에 쌓여 온갖 몸서리 가운데 내면으로 전율했다.
그러면서 제일로 놀랍고 안정된 해답을 찾게 되는 것 같았다.
연희는 먹물 같은 어둠 속에 한참이나 웅크리고 앉아 기도하고 희구했다.
연희의 가슴이 햇솜마냥 부풀어 올랐다.
연희는 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랑해요
연희의 이 고백은 열망의 곤혹이었으나 불요불굴이었다.
아침이 되었을 때 연희는 조용하고 안정된 손이 생애에 질서를 가져다 주는 것을 느끼며 눈을 떴다.
연희는 수업과제를 검토하기 위해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폈다.
준호에게서 메일이 와 있었다.
연희는 정돈된 소녀와 같은 마음으로 준호의 메일을 열었다.
童貞
난 옹졸하고 함부로 말하는게 얼마나 많았는지...
당신과 대화하거나 당신의 행동을 볼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라고 부끄러움을 티내지 않으려 참 많이 애쓴 적이 여러번 이었습니다.
당신과 가까워 질수 록 당신의 깊음에 놀라고 스스로 초라함이 커져갑니다.
당신을 알지 못할 때 함부로 뱉은 말이 항상 날 구속했었습니다.
연락하지 말라면 이유도 물어보지 않겠노라고..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순간에서도 당신이 정색을 하고 말을 머뭇거리면
혹시 헤어지자는 얘기일까
긴장이 되어 목이 뻣뻣하고 피가 역류하는 느낌이었습니다.
내가 했던 말이 항상 날 짓눌렀기 때문에 긴장하고 두려워 할 수 밖에 없었나 봅니다.
어젯밤 갑자기 맘이 동요했던 것이 아니라
이전부터 날 종용하고 다급하게 만드는 기운이 급작스레
나 너 좋아해 라는 말을 듣고 싶다는 욕망을 간절하게 했나봅니다.
그냥 그 말이 너무 듣고 싶었습니다.
내 모든 투정은 그 말을 듣고 싶다는 것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요.
선생님으로 시작해서 정을 준 사람은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습니다.
내가 성인이 되고서 사랑해 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면 잘 믿기지 않겠죠?
아니 자주 듣기도 했지만 오늘 같은 적은 없었네요.
책상 앞에 비스듬히 앉아서 살짝 고인 눈물을 훔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내 모습을 추스리고 밖에 나가 담배를 피우며 하늘을 보고 산을 보는데
내 모든 피가 밑으로 밑으로 내려가는 느낌이었습니다.
머리는 텅 비어버리고 발바닥만 감각이 있는 듯.
삼각형이 되어버린 듯.
많이 아프면 극약을 쓰게 되죠.
독약을 잘 쓰는 사람이 명의라고 합니다.
다시 책상에 앉으니 독약을 마신 사람처럼 쓰러지더군요.
견디기 힘들었어요.
마냥 행복하고 기쁨에 춤춰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며 잠들었어요.
시간이 지나고 깨어 책상에 앉으니
부유하면서 날 괴롭히던 먼지들이 가만히 가라앉았습니다.
스스로 힘들게 하던 몹쓸 상상들의 작은 조각들이
아래로 아래로 가라 앉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당신으로부터 사랑이라는 묘목을 받았구나 했습니다.
당신은 쉽사리 꺽기지 않을 큰 묘목을 주고 싶어하지 않았을까 했는데
내 조급함이 일찍 내게 넘기도록 했나봅니다.
지금 당신을 보러 갈 수 없는 현실이 있고,
우리 사이가 세상에 알려져 비굴한 내 모습을 보이게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내가 받은 이 나무를 잘 가꾸고 키우고 싶습니다.
이제 또 다른 시작의 선에 서 있습니다.
당신이 항상 말하듯 나무는 많은 상처를 받고 또 이겨내며 성장할테죠.
바람에 흔들려 꺾이고 혹은 전기톱에 넘어져 불쏘시개가 되거나 펄프로 변해버릴지라도
당신을 사랑했음을 기뻐하며 마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싶습니다.
안타까운 건 그 말을 들었을 때 내 표정이 어땠는지 당신이 볼 수 없었다는 게..
단 한번 뿐일 표정이었을텐데
당신이 말하는 그 순간 당신 눈빛은 어땠는지 내가 볼 수 없었다는 게..
그 찰나를 같이 할 수 없었다는 게 안타깝습니다.
메일을 쓰려고 맘먹었을 때 잘 쓰려고 하지 않았고
쓴 글은 다시 읽고 수정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하고 시작했습니다.
오타를 수정하고 맞춤법을 수정하고 내용을 다듬으면 보낼 수 없을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내가 뭐라 썼는지 내가 하고픈 말을 정확히 전달했는지
만나면 아끼지 말고 다시 한번 말해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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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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