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돌아갔을 때 준호는 식탁에 앉아 위스키를 마시고 있었다.
나는 준호가 먼저 말을 시작하기를 기다렸지만
동시에 지훈에 대해 꼬치꼬치 물어볼 까봐 겁이 났다.
우려는 곧 현실이 되었다.
준호는 내가 옷을 갈아입고 방 정리를 하고 세탁한 빨래를 건조대에 다 널 때 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불편한 침묵을 깨고 나는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나..
-위스키 싫어하는데 이걸 마셔요?
라는 말 보다 더 신통한 말은 내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독한 걸 마시고 싶은데..
소주를 사러 나가면 연희씨가 그 남자와 함께 있는 걸 보게 될까봐..
이렇게 말하는 준호의 목소리는 그렇게도 이상했다.
준호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목소리에 관해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돌같이 고요한 목소리였다.
-별 얘기 안 했어요.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 거짓말을 들키게 될까봐 불안했는데 그것은 적중했다.
-그런데 왜 안절부절 못하고 나한테 미안해하죠?
-그건 혼자 남겨뒀던 게 마음에 걸리니까..
-그리고 또?
-또?
-연희씨는 감정을 잘 숨기지 못하는 사람이에요.
기쁨도 슬픔도 남 보다 민감하게 느끼고 또 그것이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사람이잖아요.
그 사람에게서 어떤 나쁜 소리를 들은 건가요?
감정을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할 때 사람이란 얼마나 자신을 우스꽝스럽게 만들기 쉬운 것일까.
특히 나와 같이 거짓말에 대해 지나친 결벽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더 그럴 것이다.
나는 점점 궁지에 몰리는 느낌이었다.
-내가 민숙이에게 준호씨 이야기를 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아요.
나는 이 말을 아주 예사롭게 했으나 그 속에는 공포와,
공포와 호기심이 숨겨져 있었다.
그 호기심은 일종의 경박한 모험의 맛이 따르는 것이었다.
(지금은 내가 준호를 획득하거나 지훈의 의혹을 결정적으로 극복할 기회일지도 모른다)
내 내부는 준호를 사랑하는 마음과 지훈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그것 뿐만은 아닐거에요. 연희씨 얼굴에 쓰여 있어요.
준호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아야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것을 지금 알기로 결심했다는 듯이 내 말을 기다리고 있다.
-한 잔 마셔야겠어요.
나는 초조해 하며 위스키를 잔에 따랐다.
그러나 내 손이 얼마나 떨리는가를 보고 준호는 병을 내 손에서 빼앗아 자신이 따랐다.
내가 이 곤란한 상황에서 건져내어지는 일이란 없을 것 같았다.
대화는 가라앉기 시작했다.
-지훈이는 모든 이야기를 알아요.
나는 우회적 표현을 포기하고 말했다.
-모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이 우리 이야기를 다 들어도 될 만큼 연희씨에게 의미 있는 사람인가요.
-그렇다고 생각해요.
-남자들 사이의 신비스러운 적의에 대해 연희씨는 이해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준호는 실망의 빛을 띠며 말했다.
나는 어떤 힘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옳은 일을 하고 있는 걸까?
내 이성이 암초에 부딪혀 파산하고 있는 것이라면?
나는 괴로울 만큼 혼란상태에 빠졌다.
-나는 지훈이에게 우리의 이야기를 알릴 필요성을 느꼈어요.
하지만 그래요. 나는 모욕을 당했고 조소받았어요.
그래서 결국 설득을 단념했어요.
내가 여기까지 말했을 때,
준호는 단 한 모금으로 언더글라스에 담긴 반 잔의 위스키를 마셔 버리고
또 반잔을 마신 뒤에 덜 우울해 보였으나
여전히 이상하게 동요하고 있는 것 같이 보였다.
이날 밤 우리는 모두가 지나치게 마시고 있었다.
-그 사람의 어떤 말이 연희씨를 단념시켰죠?
준호는 나의 말을 몹시 기다리고 있었다.
탐욕적인 집중력 마저 보이면서..
-모든 게 show라고 했어요. 하지만 나는 그 말이 틀렸다는 걸 알아요.
그런데 그 순간에 나는..
내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준호씨의 또 다른 말이 떠올랐어요.
“The show must go on”
정적이 흘렀다.
그것은 심장에 총알이 박힌 사람이
즉시로 충격을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오는 정적 같았다.
그리고 곧이어 나는 준호의 얼굴에서 모든 색깔이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지금 준호의 얼굴 속에는 아무런 인간적인 감정도 없는
정지의 상태가 지배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달라고 빌고 싶었다.
준호가 다음 말을 했을 때, 나는 내가 한 말이 자살적 고백이었음을 깨달았다.
-틀렸다는 걸 안다면 연희씨는 내가 했던 말을 떠올리지 않았을테죠.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것일 수밖에 없다.
나는 사실 보다 더 어리석게 도덕적으로 자신을 만든 것이었다.
나는 공포를, 목을 죄는 공포를 느꼈다.
삶에 대한 공포, 닥쳐올 것에 대한 공포를..
아침에 일어났을 때 전날과 아주 달라진 것을 발견하는 일이 있다.
갑자기 공기가 달라지고 표정의 사소한 변화 까지 달라지는 느낌.
다른 사람은 보아도 모르겠지만 우리 자신은 잘 알고 있는 변화.
나는 준호의 다른 모습이 어둠에서 떠오르는 것을 슬픔에 가득 찬 마음으로 보았다.
처음에는 그것이 오해로 비롯된 사랑이 취할 수 있는 여러 변덕스런 형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오해는 얼마나 무서운가.
이런 오해는 말이나 견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것이며 풀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더 이상 다리를 놓아 볼 수 없는 아주 깊은 낯섦.
내가 말한 것은 모두가 표면적이고 오해되기 쉬우며 바보 같은 것이었다.
나는 거짓말을 증오했었다.
거짓말은 나에게는 비겁으로 보였었다.
그리고 나는 비겁을 싫어하니까.
나에게서도 다른 사람에게서도.
그런데 이제야 나는 마치 밤이 필요한 것처럼 비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누구나 종종 그것이 필요하고 우리는 그것을 허락해 주어야 한다.
그것은 아무나 호기심을 가지고 건드리고 파괴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생 위에 펼쳐진 베일인 것이다.
내가 준호의 옛 말을 기억한 것은 불쾌한 암시였다.
그리고 그것을 사실대로 말한 것은
저주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올 수 있도록 문을 연 것과 같았다.
우리는 그날 밤 처음으로 말다툼을 한 것 같았고
대부분의 다툼이 그렇듯 둘 다 상처를 입었다.
몰락은 서서히 내리막길로 접어드는 것이 아니라
단 한 번의 어긋남으로 순식간에 벼랑 아래로 떨어진 충격과도 같이 나를 덮쳤다.
준호는 어두워졌고 웃음을 잃었다.
나는 서리 같은 우울 속에 남겨졌고 나의 고독이 눈앞에 나타났다.
우리는 마찬가지로 항상 함께 있었지만
나는 너무나도 멀리 준호에게서 유리되었다.
준호가 곁에 있는데도 나는 준호에게 속해있지 않았고
나 자신에게도 속해있지 않았다.
그것은 불안정 가운데 방랑이었다.
그러나 준호는 한 가지 수수께끼를 나에게 던져주었다.
그것은 준호의 급작스런 변화가,
나의 고백에 의한 것인지,
내가 모르는 준호에게 일어난 어떤 나쁜 일 때문인 것인지가
불분명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것을 알아야 했다.
그러나 준호가 의사면허시험을 통과할 때 까지는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나는 견디기 힘들 만큼 지루하게 계속되는 답답한 고통에 시달렸다.
그 고통은 마치 둔하게 파고 들지만 과히 아프지는 않은 치통처럼
아직 견딜 수 있는 방식으로 나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이윽고 이런 생각은 나를 정복하고 나를 마취시키고 나를 굴복시켰다.
나는 그 때문에 병이 났고 일을 할 수가 없어졌다.
어느 날 나는 체면 없는 대담성을 가지고
연애에서 퇴짜 맞은 여자의 넋두리와도 같이 못생긴 말 한 마디를 외쳤다.
-변한건가요?
그러자 준호는 연민에 찬 시선을 내게 던지며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그러더니 준호는 대답의 끝 무렵에 퉁명한 냉정의 막을 뚫고
한 줄기의 호의와 따스함을 보이며 이렇게 덧붙였다.
-변한 건 아무것도 없어요.
다만 나는 당분간 조용히 있고 싶어요. 아무런 충돌도 없이.
사랑해요.
우선 나는 마치 오랫동안 계속된 가뭄 뒤에 첫 번째 빗방울이
죽은 줄 알았던 싹 위에 떨어지는 것을 본 농부의 아직 의심스러운,
긴장된 환희와도 비슷한 기쁨 속에 잠기는 것 같았다.
너무나 오랜, 희망 없었던 기다림 위에 딱딱하게 떨어진 아픈 기쁨이었다.
나는 약간의 익숙하지 않은 수치스러움도 느꼈지만
이런 종류의 도취에 나를 맡겼다.
나는 위험과 위험 사이를 조심스럽게 소리 없이 살고 있는 사람 같았다.
준호가 면허시험을 무사히 치르고 며칠이 지난 1월의 어느 날 우리는 공원을 산책했다.
하늘에서는 빛나는 광선이 쏟아지고 있었다.
냉쾌한 공기와 겨울의 신선한 향기에 넘친 아름다운 오후였으나
나는 아무것도 보지 않았고 아무것도 느끼지 않았다.
준호의 조심스럽게 내 눈치를 살피는 태도는
이야기를 듣기도 전에 나에게서 오후의 평화를 빼앗아 가버리고
이름 모를 어떤 패배를 각오시키고 있었다.
나는 준호가 먼저 말을 시작하기를 기다렸지만
동시에 지훈에 대해 꼬치꼬치 물어볼 까봐 겁이 났다.
우려는 곧 현실이 되었다.
준호는 내가 옷을 갈아입고 방 정리를 하고 세탁한 빨래를 건조대에 다 널 때 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불편한 침묵을 깨고 나는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나..
-위스키 싫어하는데 이걸 마셔요?
라는 말 보다 더 신통한 말은 내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독한 걸 마시고 싶은데..
소주를 사러 나가면 연희씨가 그 남자와 함께 있는 걸 보게 될까봐..
이렇게 말하는 준호의 목소리는 그렇게도 이상했다.
준호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목소리에 관해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돌같이 고요한 목소리였다.
-별 얘기 안 했어요.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 거짓말을 들키게 될까봐 불안했는데 그것은 적중했다.
-그런데 왜 안절부절 못하고 나한테 미안해하죠?
-그건 혼자 남겨뒀던 게 마음에 걸리니까..
-그리고 또?
-또?
-연희씨는 감정을 잘 숨기지 못하는 사람이에요.
기쁨도 슬픔도 남 보다 민감하게 느끼고 또 그것이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사람이잖아요.
그 사람에게서 어떤 나쁜 소리를 들은 건가요?
감정을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할 때 사람이란 얼마나 자신을 우스꽝스럽게 만들기 쉬운 것일까.
특히 나와 같이 거짓말에 대해 지나친 결벽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더 그럴 것이다.
나는 점점 궁지에 몰리는 느낌이었다.
-내가 민숙이에게 준호씨 이야기를 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아요.
나는 이 말을 아주 예사롭게 했으나 그 속에는 공포와,
공포와 호기심이 숨겨져 있었다.
그 호기심은 일종의 경박한 모험의 맛이 따르는 것이었다.
(지금은 내가 준호를 획득하거나 지훈의 의혹을 결정적으로 극복할 기회일지도 모른다)
내 내부는 준호를 사랑하는 마음과 지훈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그것 뿐만은 아닐거에요. 연희씨 얼굴에 쓰여 있어요.
준호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아야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것을 지금 알기로 결심했다는 듯이 내 말을 기다리고 있다.
-한 잔 마셔야겠어요.
나는 초조해 하며 위스키를 잔에 따랐다.
그러나 내 손이 얼마나 떨리는가를 보고 준호는 병을 내 손에서 빼앗아 자신이 따랐다.
내가 이 곤란한 상황에서 건져내어지는 일이란 없을 것 같았다.
대화는 가라앉기 시작했다.
-지훈이는 모든 이야기를 알아요.
나는 우회적 표현을 포기하고 말했다.
-모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이 우리 이야기를 다 들어도 될 만큼 연희씨에게 의미 있는 사람인가요.
-그렇다고 생각해요.
-남자들 사이의 신비스러운 적의에 대해 연희씨는 이해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준호는 실망의 빛을 띠며 말했다.
나는 어떤 힘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옳은 일을 하고 있는 걸까?
내 이성이 암초에 부딪혀 파산하고 있는 것이라면?
나는 괴로울 만큼 혼란상태에 빠졌다.
-나는 지훈이에게 우리의 이야기를 알릴 필요성을 느꼈어요.
하지만 그래요. 나는 모욕을 당했고 조소받았어요.
그래서 결국 설득을 단념했어요.
내가 여기까지 말했을 때,
준호는 단 한 모금으로 언더글라스에 담긴 반 잔의 위스키를 마셔 버리고
또 반잔을 마신 뒤에 덜 우울해 보였으나
여전히 이상하게 동요하고 있는 것 같이 보였다.
이날 밤 우리는 모두가 지나치게 마시고 있었다.
-그 사람의 어떤 말이 연희씨를 단념시켰죠?
준호는 나의 말을 몹시 기다리고 있었다.
탐욕적인 집중력 마저 보이면서..
-모든 게 show라고 했어요. 하지만 나는 그 말이 틀렸다는 걸 알아요.
그런데 그 순간에 나는..
내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준호씨의 또 다른 말이 떠올랐어요.
“The show must go on”
정적이 흘렀다.
그것은 심장에 총알이 박힌 사람이
즉시로 충격을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오는 정적 같았다.
그리고 곧이어 나는 준호의 얼굴에서 모든 색깔이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지금 준호의 얼굴 속에는 아무런 인간적인 감정도 없는
정지의 상태가 지배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달라고 빌고 싶었다.
준호가 다음 말을 했을 때, 나는 내가 한 말이 자살적 고백이었음을 깨달았다.
-틀렸다는 걸 안다면 연희씨는 내가 했던 말을 떠올리지 않았을테죠.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것일 수밖에 없다.
나는 사실 보다 더 어리석게 도덕적으로 자신을 만든 것이었다.
나는 공포를, 목을 죄는 공포를 느꼈다.
삶에 대한 공포, 닥쳐올 것에 대한 공포를..
아침에 일어났을 때 전날과 아주 달라진 것을 발견하는 일이 있다.
갑자기 공기가 달라지고 표정의 사소한 변화 까지 달라지는 느낌.
다른 사람은 보아도 모르겠지만 우리 자신은 잘 알고 있는 변화.
나는 준호의 다른 모습이 어둠에서 떠오르는 것을 슬픔에 가득 찬 마음으로 보았다.
처음에는 그것이 오해로 비롯된 사랑이 취할 수 있는 여러 변덕스런 형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오해는 얼마나 무서운가.
이런 오해는 말이나 견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것이며 풀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더 이상 다리를 놓아 볼 수 없는 아주 깊은 낯섦.
내가 말한 것은 모두가 표면적이고 오해되기 쉬우며 바보 같은 것이었다.
나는 거짓말을 증오했었다.
거짓말은 나에게는 비겁으로 보였었다.
그리고 나는 비겁을 싫어하니까.
나에게서도 다른 사람에게서도.
그런데 이제야 나는 마치 밤이 필요한 것처럼 비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누구나 종종 그것이 필요하고 우리는 그것을 허락해 주어야 한다.
그것은 아무나 호기심을 가지고 건드리고 파괴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생 위에 펼쳐진 베일인 것이다.
내가 준호의 옛 말을 기억한 것은 불쾌한 암시였다.
그리고 그것을 사실대로 말한 것은
저주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올 수 있도록 문을 연 것과 같았다.
우리는 그날 밤 처음으로 말다툼을 한 것 같았고
대부분의 다툼이 그렇듯 둘 다 상처를 입었다.
몰락은 서서히 내리막길로 접어드는 것이 아니라
단 한 번의 어긋남으로 순식간에 벼랑 아래로 떨어진 충격과도 같이 나를 덮쳤다.
준호는 어두워졌고 웃음을 잃었다.
나는 서리 같은 우울 속에 남겨졌고 나의 고독이 눈앞에 나타났다.
우리는 마찬가지로 항상 함께 있었지만
나는 너무나도 멀리 준호에게서 유리되었다.
준호가 곁에 있는데도 나는 준호에게 속해있지 않았고
나 자신에게도 속해있지 않았다.
그것은 불안정 가운데 방랑이었다.
그러나 준호는 한 가지 수수께끼를 나에게 던져주었다.
그것은 준호의 급작스런 변화가,
나의 고백에 의한 것인지,
내가 모르는 준호에게 일어난 어떤 나쁜 일 때문인 것인지가
불분명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것을 알아야 했다.
그러나 준호가 의사면허시험을 통과할 때 까지는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나는 견디기 힘들 만큼 지루하게 계속되는 답답한 고통에 시달렸다.
그 고통은 마치 둔하게 파고 들지만 과히 아프지는 않은 치통처럼
아직 견딜 수 있는 방식으로 나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이윽고 이런 생각은 나를 정복하고 나를 마취시키고 나를 굴복시켰다.
나는 그 때문에 병이 났고 일을 할 수가 없어졌다.
어느 날 나는 체면 없는 대담성을 가지고
연애에서 퇴짜 맞은 여자의 넋두리와도 같이 못생긴 말 한 마디를 외쳤다.
-변한건가요?
그러자 준호는 연민에 찬 시선을 내게 던지며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그러더니 준호는 대답의 끝 무렵에 퉁명한 냉정의 막을 뚫고
한 줄기의 호의와 따스함을 보이며 이렇게 덧붙였다.
-변한 건 아무것도 없어요.
다만 나는 당분간 조용히 있고 싶어요. 아무런 충돌도 없이.
사랑해요.
우선 나는 마치 오랫동안 계속된 가뭄 뒤에 첫 번째 빗방울이
죽은 줄 알았던 싹 위에 떨어지는 것을 본 농부의 아직 의심스러운,
긴장된 환희와도 비슷한 기쁨 속에 잠기는 것 같았다.
너무나 오랜, 희망 없었던 기다림 위에 딱딱하게 떨어진 아픈 기쁨이었다.
나는 약간의 익숙하지 않은 수치스러움도 느꼈지만
이런 종류의 도취에 나를 맡겼다.
나는 위험과 위험 사이를 조심스럽게 소리 없이 살고 있는 사람 같았다.
준호가 면허시험을 무사히 치르고 며칠이 지난 1월의 어느 날 우리는 공원을 산책했다.
하늘에서는 빛나는 광선이 쏟아지고 있었다.
냉쾌한 공기와 겨울의 신선한 향기에 넘친 아름다운 오후였으나
나는 아무것도 보지 않았고 아무것도 느끼지 않았다.
준호의 조심스럽게 내 눈치를 살피는 태도는
이야기를 듣기도 전에 나에게서 오후의 평화를 빼앗아 가버리고
이름 모를 어떤 패배를 각오시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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