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아침 나는 8시가 조금 넘어 눈을 떴다.
준호는 보이지 않았고 메모가 남겨져 있었다.
(조깅하고 올게요.)
나는 준호를 위해 아침을 준비하기로 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계란과 감자 몇 알, 생수가 있었고
찬장에는 통조림 햄과 인스턴트 북어국 재료가 있었다.
이거면 오므라이스 정도는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재빠르게 움직였다.
준호가 돌아오면 곧바로 식탁에 앉을 수 있도록 세팅을 끝내놓고 라디오를 켰다.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 2악장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짐머만 버전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짐머만은 이 곡을 살아생전 쇼팽이 원했던 대로 로맨틱하고 우울하게 연주하고 있었다.
어쩌면 내 기분이 가라앉아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들려온건지도 몰랐다.
은은하게 음악이 울려 퍼지게 하고서 나는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헐벗은 가로수가 하늘을 우러르고 있었다.
가을은 벗고, 벗은 알몸을 들추며 더 벗을 것을 찾으려 하는 것 같았다.
구름이 흘러가는 하늘을 바라보며 나는 불현 듯
우리 두 목숨에게 오직 한 번이면 흡족할 신의 가호를 빌었다.
그것이 예지적 본능처럼 느껴지자 내 몸은 미세하게 떨려왔다.
커피를 끓이려고 주전자에 물을 받고 있을 때 준호가 숨을 몰아쉬며 들어왔다.
늦가을인데도 준호는 츄리닝 팬츠에 티셔츠 하나만을 입고 있었다.
땀으로 흠뻑 젖은 티셔츠를 보니 얼마나 필사적으로 뛰었는가를 알 수 있었다.
-늦잠자라고 일부러 안 깨웠는데 일찍 일어났어요?
월요일은 오후 늦게나 첫 수업 시작하잖아요.
준호가 우울에 섞인 듯한 미소를 지으며 낮게 가라앉은 어조로 말했다.
-자료 찾으러 도서관에 들러야 해서요.
배고프죠? 샤워는 나중에 하고 우선 아침 부터 챙겨요. 오므라이스를 만들었어요.
-고마워요.
라고 말하며 준호는 식탁에 앉아 조용히 먹기 시작했다.
준호의 모습은 왠지 낯설었다.
생기 없고, 무력해 보였고, 그늘이 있었는데
그 모습이 내겐 묘하게 섹시해 보였다.
나는 준호에게 생긴 안 좋은 일이 무엇인지 다시 물어보고 싶었지만
나와 함께 하는 시간 외의 준호의 사생활에 간섭할 하등의 권리가
내겐 없다는 생각으로 울적해지며 포기하고 말았다.
우리는 저녁에 아파트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준호에게 일어난 수수께끼 같은 변화의 돌연성과
지훈의 가혹하고 일방적인 심판의 간극에서 나는 평화를 빼앗겼다.
나는 일종의 불쾌한 위험신호를 들었다.
나는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오후 4시쯤 지훈에게서 문자가 왔지만 열어보지 조차 않았다.
5시쯤 한 통이 더 왔고 나는 또 확인하지 않았다.
그랬더니 7시가 넘어서 이번에는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받지 않았다.
미워서는 아니었고 해야 할 말을 찾지 못한 상태에서 지훈과 대화하는 것은
내겐 두려움이었다.
밤 열시가 넘어 힘겨웠던 수업을 모두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을 때
현관에 놓여있는 신발을 보고서 나는 준호가 와 있음을 알았다.
준호는 대자로 뻗은 자세로 침대에 누워있었고 잠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살금살금 걸어가 바로 앞에 섰을 때에도 준호는 눈을 뜨지 않았다.
그런데 돌아서 코트를 벗으려는 순간 갑자기 준호의 손이 내 팔을 잡아 휙 끌어당겼다.
나는 깜짝 놀라며 침대 위에 쓰러지듯 뉘어졌다.
준호가 내 양팔을 엑스자로 포개어 가슴에 밀착시켜 놓고
결박하듯이 뒤에서 끌어안았다.
-냄새 좋다.
준호가 내 목덜미에 코를 부비고 숨을 들이키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직 코트도 못 벗고 샤워도 안 했어요.
나는 결박에서 풀려나려고 바둥거리며 말했다.
-가만히 있어요.
준호는 나직하게 명령조로 말하며 놓아주지 않았다.
-그러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줘요.
-나중에요.
-나중에 언제요?
-어쩌면 모르는 게 나을 수도 있어요.
-왜요. 얼마나 안 좋은 일이길래?
-피곤해요. 이대로 그냥 잠들었으면 좋겠어요.
준호는 대답을 회피하고 있었다.
그때에 초인종이 울렸다.
-대답하지 말아요.
준호가 나를 안은 팔에 힘을 주며 근엄하게 말했다.
초인종은 더 세차게 울렸다.
-이 밤중에 누가 왔다면 평범한 일은 아닐거에요. 나가보고 올게요.
나는 준호를 뿌리치고 일어나 현관으로 갔다.
-누구세요?
-나야 지훈이.
나는 이 기습적인 방문과 싫은 타이밍에 불길한 혼란을 느꼈다.
나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불안과 걱정에서 이제 막 안도가 번지기 시작한 얼굴로 지훈이 옅은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늦은 시간에 갑자기 왠일이니?
나는 침실의 문을 등지고 지훈이 그쪽을 볼 수 없는 위치에 서서 말했다.
-내가 여기 왜 왔어야만 했는지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문자나 전화에 대답이 없어 걱정했는데 널 보니 우선 안심이 된다.
들어가도 되겠니?
-걱정시켜서 미안해. 그런데 손님이 와 있어.
나는 정중하지만 다정하지는 않게 말했다.
지훈의 얼굴이 표변했다.
그 시선의 적나라한 야만성은 나를 놀라게 했다.
그것은 나 때문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다보았다.
침실 문 앞에 준호가 서 있었다.
준호는 냉혹하고 우울해졌으며 거의 분노에 일그러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준호는 곧 안쪽으로 사라져버렸다.
나는 두 남자를 만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두 남자는 맹렬한 적개심을 전달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관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면 잠깐 다른 곳에서 대화할 수 있겠니?
지훈이 소외감을 감추지 못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그것 까지 안 된다고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아파트 단지 내 작은 커피숍으로 갔다.
우리는 커피를 주문했지만 둘 다 전혀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내 의견이 너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란 예상은 했었어.
지훈이 쓸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너는 내 이야기를 읽어보지도 않고 싸인해 버리고 마는 결재서류 같이 취급했어.
무가치하다고 말했지.
그런데 가치와 무가치에 관해서
절대적인 확실함을 가지고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니?
나는 동그랗게 뜬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네가 나더러 수호천사가 되어달라고 말했던 거 기억하니?
나는 속으로 (아 그랬었지)라고 생각하면서
놀란 것을 숨기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어떠한 경우에도 너의 편이야.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거야. 수호천사니까.
세상에! 천하의 채연희가 전형적인 사랑에 빠지다니 놀라워.
그런데 바로 그런 마음 때문에 너의 감정은 강하게 삶의 편견이야.
나는 누구보다 너의 행복을 바라.
그런데 그 사람은 너를 궁극적으로는 행복하게 해줄 수가 없어.
이 관계의 결말이 어떨지 선명하게 보이고, 네가 받을 상처를 알고 있는데도
계속 가라고 말하는 건 내게 있어 위선이야.
너는 무언가로부터 희생되고 있는 거야.
가치가 없다고 말한 것은 그래서야.
나는 네가 다치는 게 싫으니까.
지훈의 말 속에서는 순수하고 강렬한 애정의 파동이 느껴졌다.
-그래 무슨 말인지 알아. 윤리적이면서 Field Manual적이야. 너답기는 해.
그런데 모든 윤리가 아무 소용없어지고
양심까지도 아무 도움이 될 수 없는 상황이 있다는 것을 아니?
갑자기 아무 법칙도 없어지고 우리는 내맡겨져 있는 거야.
무엇에 내맡겨지는 것인지는 나도 모르지만.
나는 도덕적인 인간이나 뭐 그런 사람은 아니야.
나는 예를 들면 우리 부모를 무덤으로 들어가는 것 보다 나은 점이 없으리만치
모욕하기도 했어.
그러나 나는 한 번도 가짜 게임은 안 했고 이미 성립해 있는 결합관계를 언제나 존중했어.
왜냐하면...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런데 갑자기....
나는 여기서 말을 중단했다.
지훈의 너무도 깊은 절망에 찬 시선이 나를 멈칫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지훈은 저항할 힘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나는 이 묘사를 길게 끌고 있었다.
그것은 아직도 지훈을 설득하고 싶다는 바보같은 강한 욕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말이란 사람의 마음을 표현하기엔 어림없는 어설픈 방법이었다.
-그래서? 계속해봐.
지훈이 침착하고 우울하게 말했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에게 부정으로 보여 질만한 일을 하고 있어.
그런데 이것은 이미 나에게는 부정으로 생각되지 않아.
이건 내게 옳은 일이야.
그래서 내가 지금 너의 충고를 받아들여 멈춘다면
무슨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 같은 구제받을 수 없는 감정을 가지게 될거야.
끔찍한 일이야. 여기에는 법칙이 있는데 내 생은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은.
아, 누가 이 문제에서 옳게 갈피를 잡을 수 있을까.
나는 지훈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말하고 있는 것 같이 읊조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너는 상처를 받게 될거야.
이건 그 사람도 알고 있는 사실일거야.
나는 그래서 그 사람이 싫다.
지훈은 이렇게 말하면서도
아무 희망이 없음을 아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자조에 넘쳐 말했다.
-운명은 역시 운명이니까.
준호는 보이지 않았고 메모가 남겨져 있었다.
(조깅하고 올게요.)
나는 준호를 위해 아침을 준비하기로 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계란과 감자 몇 알, 생수가 있었고
찬장에는 통조림 햄과 인스턴트 북어국 재료가 있었다.
이거면 오므라이스 정도는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재빠르게 움직였다.
준호가 돌아오면 곧바로 식탁에 앉을 수 있도록 세팅을 끝내놓고 라디오를 켰다.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 2악장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짐머만 버전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짐머만은 이 곡을 살아생전 쇼팽이 원했던 대로 로맨틱하고 우울하게 연주하고 있었다.
어쩌면 내 기분이 가라앉아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들려온건지도 몰랐다.
은은하게 음악이 울려 퍼지게 하고서 나는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헐벗은 가로수가 하늘을 우러르고 있었다.
가을은 벗고, 벗은 알몸을 들추며 더 벗을 것을 찾으려 하는 것 같았다.
구름이 흘러가는 하늘을 바라보며 나는 불현 듯
우리 두 목숨에게 오직 한 번이면 흡족할 신의 가호를 빌었다.
그것이 예지적 본능처럼 느껴지자 내 몸은 미세하게 떨려왔다.
커피를 끓이려고 주전자에 물을 받고 있을 때 준호가 숨을 몰아쉬며 들어왔다.
늦가을인데도 준호는 츄리닝 팬츠에 티셔츠 하나만을 입고 있었다.
땀으로 흠뻑 젖은 티셔츠를 보니 얼마나 필사적으로 뛰었는가를 알 수 있었다.
-늦잠자라고 일부러 안 깨웠는데 일찍 일어났어요?
월요일은 오후 늦게나 첫 수업 시작하잖아요.
준호가 우울에 섞인 듯한 미소를 지으며 낮게 가라앉은 어조로 말했다.
-자료 찾으러 도서관에 들러야 해서요.
배고프죠? 샤워는 나중에 하고 우선 아침 부터 챙겨요. 오므라이스를 만들었어요.
-고마워요.
라고 말하며 준호는 식탁에 앉아 조용히 먹기 시작했다.
준호의 모습은 왠지 낯설었다.
생기 없고, 무력해 보였고, 그늘이 있었는데
그 모습이 내겐 묘하게 섹시해 보였다.
나는 준호에게 생긴 안 좋은 일이 무엇인지 다시 물어보고 싶었지만
나와 함께 하는 시간 외의 준호의 사생활에 간섭할 하등의 권리가
내겐 없다는 생각으로 울적해지며 포기하고 말았다.
우리는 저녁에 아파트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준호에게 일어난 수수께끼 같은 변화의 돌연성과
지훈의 가혹하고 일방적인 심판의 간극에서 나는 평화를 빼앗겼다.
나는 일종의 불쾌한 위험신호를 들었다.
나는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오후 4시쯤 지훈에게서 문자가 왔지만 열어보지 조차 않았다.
5시쯤 한 통이 더 왔고 나는 또 확인하지 않았다.
그랬더니 7시가 넘어서 이번에는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받지 않았다.
미워서는 아니었고 해야 할 말을 찾지 못한 상태에서 지훈과 대화하는 것은
내겐 두려움이었다.
밤 열시가 넘어 힘겨웠던 수업을 모두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을 때
현관에 놓여있는 신발을 보고서 나는 준호가 와 있음을 알았다.
준호는 대자로 뻗은 자세로 침대에 누워있었고 잠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살금살금 걸어가 바로 앞에 섰을 때에도 준호는 눈을 뜨지 않았다.
그런데 돌아서 코트를 벗으려는 순간 갑자기 준호의 손이 내 팔을 잡아 휙 끌어당겼다.
나는 깜짝 놀라며 침대 위에 쓰러지듯 뉘어졌다.
준호가 내 양팔을 엑스자로 포개어 가슴에 밀착시켜 놓고
결박하듯이 뒤에서 끌어안았다.
-냄새 좋다.
준호가 내 목덜미에 코를 부비고 숨을 들이키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직 코트도 못 벗고 샤워도 안 했어요.
나는 결박에서 풀려나려고 바둥거리며 말했다.
-가만히 있어요.
준호는 나직하게 명령조로 말하며 놓아주지 않았다.
-그러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줘요.
-나중에요.
-나중에 언제요?
-어쩌면 모르는 게 나을 수도 있어요.
-왜요. 얼마나 안 좋은 일이길래?
-피곤해요. 이대로 그냥 잠들었으면 좋겠어요.
준호는 대답을 회피하고 있었다.
그때에 초인종이 울렸다.
-대답하지 말아요.
준호가 나를 안은 팔에 힘을 주며 근엄하게 말했다.
초인종은 더 세차게 울렸다.
-이 밤중에 누가 왔다면 평범한 일은 아닐거에요. 나가보고 올게요.
나는 준호를 뿌리치고 일어나 현관으로 갔다.
-누구세요?
-나야 지훈이.
나는 이 기습적인 방문과 싫은 타이밍에 불길한 혼란을 느꼈다.
나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불안과 걱정에서 이제 막 안도가 번지기 시작한 얼굴로 지훈이 옅은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늦은 시간에 갑자기 왠일이니?
나는 침실의 문을 등지고 지훈이 그쪽을 볼 수 없는 위치에 서서 말했다.
-내가 여기 왜 왔어야만 했는지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문자나 전화에 대답이 없어 걱정했는데 널 보니 우선 안심이 된다.
들어가도 되겠니?
-걱정시켜서 미안해. 그런데 손님이 와 있어.
나는 정중하지만 다정하지는 않게 말했다.
지훈의 얼굴이 표변했다.
그 시선의 적나라한 야만성은 나를 놀라게 했다.
그것은 나 때문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다보았다.
침실 문 앞에 준호가 서 있었다.
준호는 냉혹하고 우울해졌으며 거의 분노에 일그러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준호는 곧 안쪽으로 사라져버렸다.
나는 두 남자를 만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두 남자는 맹렬한 적개심을 전달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관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면 잠깐 다른 곳에서 대화할 수 있겠니?
지훈이 소외감을 감추지 못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그것 까지 안 된다고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아파트 단지 내 작은 커피숍으로 갔다.
우리는 커피를 주문했지만 둘 다 전혀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내 의견이 너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란 예상은 했었어.
지훈이 쓸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너는 내 이야기를 읽어보지도 않고 싸인해 버리고 마는 결재서류 같이 취급했어.
무가치하다고 말했지.
그런데 가치와 무가치에 관해서
절대적인 확실함을 가지고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니?
나는 동그랗게 뜬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네가 나더러 수호천사가 되어달라고 말했던 거 기억하니?
나는 속으로 (아 그랬었지)라고 생각하면서
놀란 것을 숨기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어떠한 경우에도 너의 편이야.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거야. 수호천사니까.
세상에! 천하의 채연희가 전형적인 사랑에 빠지다니 놀라워.
그런데 바로 그런 마음 때문에 너의 감정은 강하게 삶의 편견이야.
나는 누구보다 너의 행복을 바라.
그런데 그 사람은 너를 궁극적으로는 행복하게 해줄 수가 없어.
이 관계의 결말이 어떨지 선명하게 보이고, 네가 받을 상처를 알고 있는데도
계속 가라고 말하는 건 내게 있어 위선이야.
너는 무언가로부터 희생되고 있는 거야.
가치가 없다고 말한 것은 그래서야.
나는 네가 다치는 게 싫으니까.
지훈의 말 속에서는 순수하고 강렬한 애정의 파동이 느껴졌다.
-그래 무슨 말인지 알아. 윤리적이면서 Field Manual적이야. 너답기는 해.
그런데 모든 윤리가 아무 소용없어지고
양심까지도 아무 도움이 될 수 없는 상황이 있다는 것을 아니?
갑자기 아무 법칙도 없어지고 우리는 내맡겨져 있는 거야.
무엇에 내맡겨지는 것인지는 나도 모르지만.
나는 도덕적인 인간이나 뭐 그런 사람은 아니야.
나는 예를 들면 우리 부모를 무덤으로 들어가는 것 보다 나은 점이 없으리만치
모욕하기도 했어.
그러나 나는 한 번도 가짜 게임은 안 했고 이미 성립해 있는 결합관계를 언제나 존중했어.
왜냐하면...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런데 갑자기....
나는 여기서 말을 중단했다.
지훈의 너무도 깊은 절망에 찬 시선이 나를 멈칫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지훈은 저항할 힘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나는 이 묘사를 길게 끌고 있었다.
그것은 아직도 지훈을 설득하고 싶다는 바보같은 강한 욕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말이란 사람의 마음을 표현하기엔 어림없는 어설픈 방법이었다.
-그래서? 계속해봐.
지훈이 침착하고 우울하게 말했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에게 부정으로 보여 질만한 일을 하고 있어.
그런데 이것은 이미 나에게는 부정으로 생각되지 않아.
이건 내게 옳은 일이야.
그래서 내가 지금 너의 충고를 받아들여 멈춘다면
무슨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 같은 구제받을 수 없는 감정을 가지게 될거야.
끔찍한 일이야. 여기에는 법칙이 있는데 내 생은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은.
아, 누가 이 문제에서 옳게 갈피를 잡을 수 있을까.
나는 지훈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말하고 있는 것 같이 읊조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너는 상처를 받게 될거야.
이건 그 사람도 알고 있는 사실일거야.
나는 그래서 그 사람이 싫다.
지훈은 이렇게 말하면서도
아무 희망이 없음을 아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자조에 넘쳐 말했다.
-운명은 역시 운명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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